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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우 건축가의 '함께 떠나고 싶은 그곳'] 답사옴니버스 — 강원 2편ARTICLE 2025. 6. 4. 12:32
5. 속초 동명항
동명항은 속초시 동북쪽에 위치한 항구로 미시령터널 후 제일 먼저 동해 바다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전망이 좋은 누각, 영금정을 지나 길게 축조된 방파제 끄트머리에는 언제나 그렇듯이 붉은 등대가 위치하고 방파제 안쪽에는 크고 작은 선박들이 이마를 마주대고 정박하고 있다. 방파제에서는 낚시를 즐길 수 있고 진입구 쪽에는 활어시장이 있어 고깃배들이 잡아온 싱싱한 횟감들이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다. 모처럼 속초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에게는 가성비 좋은 다양한 해산물을 맛볼 수 있는 장소다. 속초 8경 중 제 1경으로 꼽힌다는 ‘속초등대전망대’는 당초 등대로만 기능했으나 지금은 일반에 개방되어 전망대 역할까지 담당하고 있다. 바위산 위에서 동명항의 풍경을 조망할 수 있는 장소로 먼 거리에서도 풍경화를 만들고 있다. 동명항 인근 식당 중에 ‘이모네식당’은 꼭 들러보는 맛집이다. 주말이면 번호표를 뽑고 기다려야 할 만큼 인기가 좋은데 칼칼한 생선찜 맛은 중독성이 느껴질 정도로 탁월하다. 가오리, 명태, 도루묵 등을 함께 조린 생선 모듬 찜과 소주를 곁들이면 혀끝의 말초신경으로 행복감이 전달된다. 남은 양념 국물에 밥을 비비면 밥도둑이 따로 없다.
동명이라는 뜻은 본래 ‘동쪽에 해가 떠 밝아온다’라는 의미로 매년 새해 첫 날, 동해 바다 일출을 보기 위해 많은 인파가 모이는 일출 핫플레이스이기도 하다. 호기심 때문에 한 번 가본 적이 있는데 그렇게 사람들이 많을 줄은 몰랐다. 전국 원근 각처 사방에서 모인 인파들 일텐데 새해 첫 일출 앞에서 만사형통의 소망을 비는 심리는 누구나 비슷한 가보다. 미시령을 넘기 전에 우람한 바위가 아름다운 화암사에 들러보는 것도 추천한다.
6. 미시령 울산바위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미시령터널로 향하면 울산바위가 도열한 채로 환송인사를 건넨다. 산림을 거느리고 상부에는 마치 수정처럼 울산바위 능선의 뾰족거리는 바위들의 행진과 다양한 표정은 도로에서 멈추고 순간을 포착해서라도 카메라에 담고 싶어진다. 겨울에 잔설이 보이는 풍경도 스케치 욕구를 자극한다.
강원도 속초에 다녀오는 겨울 길은 춥고 을씨년스럽다. 특히 눈이 내리면 도로의 풍경은 감성적으로 뒤바뀐다. 마른 가지의 겨울 산에는 함박눈이 소리 없이 쌓이고 점점 굵어지는 눈 속에 풍경은 함몰된다. 이미 도로 위에는 사람의 발자국과 차량의 흔적들이 시간의 켜를 두고 어지럽게 중첩되고 있다. 다음 겨울이 또 기대된다.
7. 주전골 계곡
설악산 국립공원 오색약수터에서 한계령으로 오르는 풍광이 뛰어난 계곡 길이다. 용소폭포 인근의 시루떡 바위가 마치 엽전을 쌓아 놓은 것처럼 보여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특히 단풍이 절정인 가을 무렵의 경치가 아름다운데 우연하게도 한 해가 저무는 12월 하순에 방문하게 되었다. 한계령휴게소를 지나 양양 방향으로 내려가다가 흘림골 인근에서 오색약수까지 하산로를 택했다. 을씨년스러운 한겨울 날씨라서 등산로는 인적이 드물다. 얼음 밑으로 차가운 계곡물은 바위 사이를 비집고 흐르고 있다.
내리막이라 힘들지 않게 걷는 산책로에는 드문드문 목제 출렁다리도 있어 다리 중간쯤에 서서 동양화 한 폭을 배경으로 기념사진도 찍어본다. 기암절벽의 중첩된 바위는 장엄한 크기를 자랑하고 중간 중간에는 소나무가 박혀있어 신선의 세계를 상상하게 한다. 겨울나무들은 제각기 옷을 벗고 침묵 속에서 동안거(冬安居) 수행에 정진하고 있다. 사방은 조용한데 얼음장 밑으로 계곡물 흐르는 소리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듯하다.
8. 평창올림픽 개폐회식장
벌써 7년이 지났지만 23회 세계동계올림픽이 평창에서 열렸다. 기억하건대 한겨울이어서 평창은 추웠지만 개회식의 열기는 뜨거웠다. 잘 준비되고 치러진 개회식 행사는 지구 축제를 열광하는 전 세계 인류에게 감동을 전달했고 극찬을 받았다. 행동하는 평화(Peace in Motion)를 주제로 하여 전 세계인을 하나로 잇는 평창동계올림픽의 서막을 현장에서 생생하게 감상할 수 있는 기회는 행운이었다.
무대 위의 배우들, 조명과 음악과 영상, 그리고 폭죽과 드론까지 모두 융합되어 훌륭한 퍼포먼스를 만들어 냈다. 이런 최고의 공연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탄탄한 연출을 기획한 무대감독의 역량도 있지만 공연에 적합한 형태를 구상하고 오륜기를 상징한 오각형의 공연장을 디자인한 건축가와 부족한 공사예산이지만 최선의 건축물을 완성해 준 시공자의 숨은 노력이 있었다.
하지만 현재 이 시설은 사라지고 없다. 올림픽 역사상 최초의 개폐회식 전용 시설물로서 행사를 마치면 필요한 부분만 남기고 모두 철거되는 임시건축물이었기 때문이다. 즉, 올림픽 모드에서는 개폐회식의 감동을 극대화하고, 이 후 레거시 모드에서는 감동의 순간을 잘 보전하고 경제적으로 지속 가능하게 운용되도록 하는가에 초점이 맞춰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지관리비를 절감하고 철거되는 자재와 좌석들은 모두 재활용되도록 했다. 행사 후 세금만 잡아먹어 골치 아픈 공공 체육시설이 국내에 부지기수인데 지혜로운 결정이었다.
9. 양구 박수근 미술관
박수근미술관은 그의 출생지인 강원도 양구에 위치한다. 청명한 가을하늘 아래 방문한 미술관은 거친 자연석을 쌓아 완성한 건축으로 시간을 담아내며 주변의 맥락과 조우한다. 고단한 예술가의 삶 속에서도 꿈과 집념으로 어려운 시대를 넘었던 박수근의 숭고한 정신들이 작품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박수근의 작품은 소박하고 단순한 우리네 서정을 거칠게 덧칠한 독특한 유화의 질감으로 표현한다. 51세의 젊은 나이에 간경화와 응혈증이 크게 악화되어 요절한 불운한 작가의 예술혼이 조용한 절규로 다가온다.
미술관 역시, 공교롭게도 50대 중반에 요절한 건축가 이종호의 유작이자 수작이다. 그는 경사지게 쌓은 자연석의 돌벽을 따라 진입 동선을 회유시키며 마치 신성한 장소로 향하듯 전시 공간의 진입 과정을 갖도록 디자인했다. 현관 앞에 도달하면 입구는 전면의 동산으로 위요되어 포근하다. 실개울이 흐르고 다리 건너편에는 박수근의 동상이 쭈그리고 앉아 자신의 미술관을 바라보고 있다. 옛 빨래터 옆에는 자작나무 숲이 창백한 줄기와 가지를 뻗으며 겨울을 준비 중이다. 주변의 한적함이 미술관의 정취를 더해가고 여유로운 산책을 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장소지만 미술관을 떠나려는 이들의 발길을 붙잡고 박수근의 말은 길게 여운을 남긴다.
"세월은 흘러가기 마련이고 그러면 사람도 늙어가는 것이려니 생각할 때 오늘까지 내가 이루어 놓은 일이 무엇인가 더럭 겁도 납니다."
글/그림. 임진우 (건축가 / 정림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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