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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 FOCUS] ‘디자인살롱 서울 2025’ 컨퍼런스ARTICLE 2025. 5. 31. 01:00
브랜딩 및 공간 관련 트렌드와 인사이트를 나눠볼 수 있는 ‘디자인살롱 서울 2025(이하, 디자인살롱 서울)’이 지난 5월 8일과 9일, 이틀간 서울 삼성동 코엑스(COEX) 컨퍼런스 룸 402호에서 개최됐다. 올해 ‘디자인살롱 서울’은 ‘불확실성의 시대, 브랜드 성공 전략 & 팬덤을 구축하는 리테일 공간 디자인’을 주제로, 12인의 업계 전문가들과 함께 리테일 공간 디자인의 최신 트렌드와 혁신적 사례를 살펴보았다. 특히 빠르게 변화하고 성장하는 공간 시장 환경의 성공 전략과 함께 공간과 소비자를 연결하는 다양한 방법을 공유하는 등 실용성을 강조한 사례와 전략을 만날 수 있었다. 이에 매거진HD에서는 컨퍼런스 둘째 날 발표된 김종유 소장과 김현진 이사(디자인 스튜디오 유랩)의 ‘Blending the Boundaries: 공간과 생각을 연결하다’를 소개하고자 한다. 김종유 소장과 김현진 이사는 이번 컨퍼런스에서 최근 진행된 프로젝트를 예로 들며, 공간 디자인에 담긴 브랜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오래 머무를 수 있는 공간에 대해 심도 있게 전해 주었다.
취재. 박하나 편집장
‘Blending the Boundaries : 공간과 생각을 연결하다’
_ 디자인 스튜디오 유랩의 김종유 소장과 김현진 이사김종유 소장 김종유 소장과 김현진 이사(디자인 스튜디오 유랩)는 이번 발표 주제와 관련하여, 최근 다수의 서적을 읽으며 ‘경계 없음’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고 밝혔다. 이들은 다양한 콘셉트의 작업을 진행함에 있어, 그리고 일상생활 속에서도 공간과 생각을 연결하는 과정의 중요성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고 언급했다. 발표는 디자인 스튜디오 유랩(U.lab)에 대한 간략한 소개로 시작되었으며, 이어서 발표 주제와 연관된 프로젝트(네이버 1784, GRAPHIC Book Store-술마시는 만화방, MAYBELL-오월의 종 빵집 등)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갔다.
U.lab 2019 Atelier
U.lab 2019 Atelier (©최용준 작가) U.lab 2019 Atelier (©최용준 작가) 서울 남영동의 100년 된 적산가옥이 디자인 스튜디오 유랩(U.lab)에 의해 창의적이고 감각적인 아틀리에로 재탄생했다. 유랩은 2007년 설립 이래 형태보다는 감각, 기능보다는 개념을 중시하는 독창적인 디자인 철학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프로젝트를 수행해온 디자인 그룹이다.
유랩이 새롭게 자리 잡은 이 적산가옥은 오랜 시간 지역의 변화를 지켜본 역사적 건축물로, 외관의 변화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내부 공간을 혁신적으로 재구성하며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제한된 면적 안에서 집중과 협업이라는 상반된 작업을 동시에 가능하게 하기 위해, 유랩은 공간을 기능적으로 분리하는 벽 설치를 선택했다.
그러나 유랩은 단순한 벽이 아닌, 개방성과 프라이버시라는 두 가지 상반된 요소를 만족시킬 수 있는 해법을 고민했다. 그 결과, 전통 소재인 삼베를 현대적인 메탈 소재와 결합한 반투명한 벽을 고안해냈다. 이는 유랩 디자이너의 어린 시절 어머니가 남는 삼베 천으로 이불을 만들어주던 기억에서 착안한 것으로, 전통의 정서를 현대적 공간에 조화롭게 녹여낸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완성된 공간은 반투명 벽을 중심으로 팀원들이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는 협업 공간과, 개별 작업에 몰입할 수 있는 집중 공간으로 나뉘어 구성됐다. 이번 프로젝트는 유랩의 창의적 해석과 전통의 현대적 재구성이 돋보인다는 평가를 받으며, 국토교통부 장관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유랩은 앞으로도 전통과 현대, 개념과 감각이 공존하는 디자인 실험을 지속할 예정이다.
네이버 1784
디자인 스튜디오 유랩(U.lab)은 ‘기술과 자연, 그리고 재료와 의미의 교차점’을 핵심 주제로, 네이버의 신사옥 프로젝트 ‘그린팩토리 2.0’, 즉 ‘네이버 1784’의 공간 계획을 주도했다. 이 프로젝트는 기존 사옥 ‘그린팩토리’의 뒤를 잇는 후속작으로, 유랩에게는 큰 도전이자 진화된 해석을 요구하는 과제였다.
기존 그린팩토리는 조수용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총괄한 프로젝트로, 당시에는 파격적인 시도였던 ‘사무공간 속 자연’이라는 개념을 도입해 주목을 받았다. 로비의 식물과 도서관 공간은 사무환경 디자인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며, 이후 업계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렇듯 강력한 선례가 존재했기에, 네이버 1784를 통해 이를 어떻게 재해석할지에 대한 고민이 프로젝트 초기부터 깊이 있게 진행되었다.
유랩은 단순한 물리적 공간 설계를 넘어서, 기술과 지속 가능성, 그리고 ‘진정한 그린’의 의미를 담아낼 수 있는 방향을 모색했다. 이에 따라 “더하는 것이 아니라 덜어내는 것”이라는 발상의 전환을 통해, 공간의 본질을 되돌아보는 새로운 해석을 제시했다.
이러한 철학은 건물 중앙 코어 공간에서 구체적으로 구현되었다. 유랩은 버려진 폐기판을 수급받아 이를 건물의 중심 벽면에 적용, 하나의 아트월로 탈바꿈시켰다. 이를 통해 자원의 순환과 절제의 미학을 동시에 보여주는 공간적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
네이버 1784 프로젝트는 기술 중심 기업의 사옥이라는 정체성을 기반으로, 자연과 재료, 지속 가능성의 의미를 공간적으로 실험한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유랩은 이 프로젝트를 통해 ‘그린’의 개념을 물리적 장식이 아닌, 철학적 실천으로 확장시키는 데 성공했다.
디자인 스튜디오 유랩(U.lab)은 네이버 사옥 내 구내식당의 고질적인 소음 문제 해결을 위해 ‘버려진 재료’의 가능성에 주목, 혁신적인 흡음 설계로 공간의 음향 환경을 개선했다. 약 1만 2천 명의 직원이 이용하는 대형 식당 공간은 다양한 대화가 한꺼번에 발생하면서 고심도의 소음 문제가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기존 네이버 ‘그린팩토리’에서도 동일한 문제가 있었던 만큼, 유랩은 후속 프로젝트인 네이버 1784의 식당 공간에서 소음을 효과적으로 제어할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그 해법은 의외의 장소에서 시작되었다. 고속도로를 지나던 중 우연히 보게 된 방음판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유랩은 이 방음판을 직접 확보하고, 도색을 벗겨내는 실험을 통해 흡음 효과를 테스트했다. 실험 결과, 고급 흡음재만큼은 아니었지만 약 70~80% 수준의 흡음 효과를 발휘하는 동시에, 비용 측면에서는 월등히 경제적인 대안임이 입증되었다.
이러한 성과는 유랩이 ‘버려진 것’에 대해 꾸준한 관심과 실험을 이어온 결과였다. 이들은 고정관념을 벗고, 기존에 사용되지 않았던 저가 소재와 폐기 자재를 창의적으로 활용함으로써 공간 설계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특히, 폐기된 컴퓨터 기판과 저가 방음판이라는 비전통적 소재만으로도 공간 마감 디자인을 완성하는 데 성공했다.
준공 이후 실제로 소음계를 통해 측정한 결과, 해당 흡음 패널은 기대 이상으로 효과적인 소음 차단 성능을 보였으며, 기능성과 경제성, 지속가능성을 동시에 충족한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유랩의 이 프로젝트는 디자인과 기술, 환경적 책임이 만나는 지점에서 창의적인 해법을 제시한 대표적 사례로, 향후 다양한 공간 설계에 있어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할 것으로 기대된다.
NAVER1784_B1F (©강민구 작가) NAVER1784_B1F (©강민구 작가) 이후 네이버 1784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사옥 내 구내식당을 단순한 식사 공간에서 일상적인 업무 공간으로 확장하는 새로운 공간 개념 ‘셧다운(Shutdown)’을 도입했다. 이는 현대 오피스 건물에서 자주 발생하는 구조적 문제, 즉 “회의실 부족”, “업무 공간 부족” 등 반복되는 공간의 비효율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한 것이다.
유랩은 직원들이 끊임없이 “무언가가 부족하다”고 말하는 점에 주목했다. 특히 식당은 하루 중 고작 2~3시간만 사용되고 대부분의 시간 동안 방치된다는 사실을 포착하고, 이 공간의 유휴 시간에 주목하게 되었다. 이들은 곧 “식당을 단순한 식사 공간으로만 사용할 것이 아니라, 회의나 개인 업무 공간으로 확장할 수는 없을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탄생한 것이 ‘셧다운’ 개념이다. 핵심은 조리, 배식, 설거지 등 식사에 필수적인 작업공간에서 발생하는 소음과 냄새만 효과적으로 차단할 수 있다면, 나머지 넓은 공간은 업무에 적합한 환경으로 전환할 수 있다는 점이다.
유랩은 이를 실현하기 위해, 조리 및 설거지 구역을 독립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가변형 벽체를 설계했다. 이 벽은 필요 시 열고 닫히며, 소리와 냄새를 동시에 차단하는 기능을 갖췄다. 이를 통해 점심시간 외의 식당 공간은 자연스럽게 회의실, 소규모 협업 공간, 개인 업무 공간 등으로 활용될 수 있게 되었다.
실제 준공 후, 유랩이 현장을 다시 찾았을 때, 직원들이 식당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소규모 미팅을 진행하고 있는 모습을 확인했다. 이는 ‘셧다운’이라는 개념이 단순한 이론을 넘어 실질적인 공간 활용 방식으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이번 사례는 기존 오피스 공간의 활용도를 극대화하며, 제한된 자원 속에서 유연하고 지속 가능한 업무 환경을 구축할 수 있는 혁신적 모델로 평가된다. 유랩은 앞으로도 사용자의 경험과 실질적인 공간 활용에 주목하는 설계를 지속해 나갈 계획이다.
일반적으로 대형 식당 공간을 살펴보면, 바닥에 배식 라인을 안내하는 그래픽이 그려져 있는 경우가 많다. 네이버의 경우에도 총 5개의 배식 라인이 존재하며, 각기 다른 음식을 제공하고 있어 직원들은 자신이 원하는 메뉴에 따라 줄을 선다. 하지만 1만 2천 명이 동시에 식사를 위해 움직이는 상황에서는 바닥의 그래픽이 제대로 보이지 않거나, 복잡하게 느껴질 수 있다.
게다가 시각적으로 지나치게 요란한 그래픽은 공간의 미적 완성도를 해칠 수 있다는 판단에서, 우리는 방향을 바꿨다. ‘바닥이 아닌 천장을 활용할 수는 없을까?’라는 생각에서 출발하여, 천장에 각각의 배식 라인을 시각적으로 유도하는 그래픽을 설치하기로 했다. 천장에 설치된 라인을 따라가면 자연스럽게 원하는 배식 라인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설계한 것이다.
또한, 천장 라인만으로는 부족할 수 있기 때문에, 중간중간 벽면에도 이정표 역할을 할 수 있는 수직 라인을 배치하였다. 이를 통해 식당을 이용하는 직원들이 더욱 직관적으로 자신의 동선을 파악하고, 혼란 없이 원하는 위치에 설 수 있도록 했다.
NAVER1784_28F (©강민구 작가) NAVER1784_28F (©강민구 작가) 흥미롭게도, 네이버 사옥 28층에 위치한 VIP 레스토랑에도 폐기판이 활용되었다. 폐기판들을 수거한 후, 콘크리트와 함께 붓고 굳힌 뒤 절단해 보았더니, 내부에서 무작위로 드러나는 다양한 전자 부품들이 오히려 독특한 질감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제작된 폐기판 콘크리트 블록을 벽면에 쌓아올려 하나의 새로운 구조물을 형성했다.
이렇듯 다양한 시도들은 단순히 재활용이나 디자인의 실험을 넘어, 우리가 이 프로젝트를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핵심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것은 바로 ‘ESG’와 같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우리가 일상에서 무심코 버리는 소재들이 오히려 공간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그 자체로 강력한 메시지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린 팩토리 2.0’은 기존의 공간을 무엇으로 채우는가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고 본질을 드러내려는 시도로 출발했다. 이는 공간 디자인에 있어 ‘담아내는 그림’이 아니라 ‘덜어내는 그림’을 지향한, 진정성 있는 프로젝트였다고 할 수 있다.
GRAPHIC Book Store - 술마시는 만화방
이번 프로젝트는 단순한 만화방을 넘어선 새로운 형태의 문화 공간, ‘그래픽 북스토어’ 프로젝트를 통해 책, 술, 그리고 ‘경험’이 공존하는 플랫폼을 성공적으로 구현했다. 특히 책을 파는 공간이 아닌, 사용자가 머무르고 체험하는 공간, 즉 ‘경험을 판매하는 플랫폼’을 만드는 데 초점을 맞췄다. 프로젝트의 출발점은 클라이언트의 “만화방이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아이디어였다. 이에 유랩은 “그 공간에서 술을 마시며 책을 보는 건 어떨까요?”라는 제안을 던졌고, 클라이언트는 즉각적으로 이에 매료되며 본격적인 기획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탄생한 그래픽 북스토어는 단순한 만화방이나 주점이 아니라, 책을 매개로 한 새로운 형태의 체험 공간으로 자리매김했고, 론칭 이후 예상보다 뜨거운 반응을 얻으며 다양한 기업과 브랜드의 협업 제안이 이어지고 있다.
유랩은 특히 현대인의 콘텐츠 소비 방식, 특히 ‘숏폼 콘텐츠’에 익숙한 20~30대의 라이프스타일에 집중했다. “10초만 지루해도 채널을 넘긴다”는 현실 속에서,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이 공간에 더 오래 머물 수 있을까? 지속 가능하게 끌어들일 수 있을까?라는 근본적인 질문에서 공간 기획이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주목한 것은 젊은 커플들의 데이트 패턴이었다. 식사 후 카페를 찾는 것이 일반적인 흐름이고, 더 감각적인 커플은 취미나 활동 중심의 데이트를 선호한다는 점에 착안해, 그래픽 북스토어는 단순히 ‘방문하는 장소’가 아니라 ‘머무는 공간’, ‘경험이 쌓이는 장소’로 설계되었다. 특히, 프로젝트는 전통적인 건축 맥락(context)에서 출발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공간은 남산을 등지고 있으며, 맞은편 빌라 거실이 그대로 노출되는 구조적 한계를 안고 있었다. 하지만 유랩은 이러한 제약을 기회로 전환했다. ‘창을 달아야겠다’, ‘책에 집중할 수 있는 내밀한 공간을 만들자’는 방향으로 설계 전략을 전환한 것이다.
그래픽 북스토어는 결과적으로, 책을 통해 일상에서의 깊은 몰입과 휴식을 제공하는 새로운 라이프스타일 공간으로 자리잡았다. 이는 콘텐츠 소비의 속도가 빨라지는 시대 속에서, 정서적 체류와 경험 중심의 공간이 어떻게 사용자와 지속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디자인 스튜디오 유랩(U.lab)은 책을 읽는 ‘자세’에서 출발한 독창적인 공간 실험을 통해 그래픽 북스토어를 완성했다. 이번 프로젝트는 단순한 책방이나 문화 공간을 넘어, 사용자 중심의 독서 경험과 실험적인 건축 재료가 조화를 이루는 ‘체험형 북 스페이스’를 지향한다.
프로젝트의 시작점은 거창한 이론이나 도시 맥락이 아닌, 지극히 일상적인 관찰에서 비롯되었다. 사람들은 책을 읽을 때 저마다 다른 자세를 취한다. 계단에 걸터앉거나, 서서 혹은 반쯤 누운 채 책에 몰입하기도 한다. 유랩은 이처럼 사람의 다양한 독서 자세를 수용하는 공간을 만들고자 했다. 그 결과, 계단식 좌석과 누워서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 등, 앉고, 기대고, 눕고, 걸터앉는 다양한 독서 방식을 담아낸 유연한 구조가 설계에 반영됐다.
공간 한 켠, 벽에 적힌 단어 ‘에토머스피어(Atmosphere)’는 이 프로젝트의 설계 철학이 집약된 개념이다. “우아하지만 화려하지 않을 것, 기능적이되 차갑지 않을 것, 고요하되 적막하지 않을 것, 빛나지만 눈부시지 않을 것.” 이 문장은 유랩이 모든 건축 작업에서 일관되게 지향하는 미감과 태도를 대변한다.
그래픽 북스토어는 또한 재료 실험의 장이기도 했다. 네이버 프로젝트에서 폐기판을 활용했던 유랩은 이번에는 건축 마감재 자체를 창작하는 데 도전했다. 실험은 일상에서 시작되었다. 우연히 눈에 들어온, 할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오래된 사전의 책등 결이 영감을 준 것이다. 유랩은 이 책의 질감을 건축 소재로 구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던 중, 종이의 질감을 세라믹으로 표현하는 작가 문평과 협업하게 되었다. 문평 작가가 제작한 세라믹은 실제로 종이처럼 보이지만 고온에서 구운 내구성 높은 소재다. 유랩은 이를 내·외장 마감재로 사용함으로써, 조형적 아름다움은 물론 지속 가능성과 실용성을 모두 만족시키는 실험적 건축을 완성했다.
외부 디자인에서도 기존 건축문법을 탈피했다. 건물은 정면에 창이 거의 보이지 않도록 설계되었고, 대신 측면 벽과 벽 사이의 틈, 그리고 건물 상단의 천창을 통해 자연광을 실내로 유도했다. 이는 단순한 조형적 선택이 아닌, 주변 빌라와 마주한 도시 환경에서 사용자에게 시각적 안정과 몰입감을 제공하기 위한 섬세한 배려였다.
그래픽 북스토어는 궁극적으로 ‘책을 읽는 방식’, ‘공간을 머무는 방식’, ‘재료를 사용하는 방식’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공간이다. 이는 유랩의 설계 철학이 이론보다 삶의 실제 경험에서 출발하고, 기능성과 감성 사이의 균형을 중시하는 것임을 잘 보여주는 프로젝트다.
GRAPHIC Book Store (©강민구 작가) GRAPHIC Book Store (©강민구 작가) 프로젝트의 출발점은 건축적 야망이 아니라, 동네 주민의 한 마디였다. “우리 집 거실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해주세요.” 이 요청은 건축가에게 단순한 배려 이상의 영감을 안겼다. “굳이 창이 많아야 할까?”라는 질문은 곧, 프라이버시와 몰입이라는 두 축으로 설계 방향을 이끌었다. 창을 최소화한 대신, 자연광의 흐름을 면밀히 조율했다. 오전 10시, 동쪽에서 서쪽으로 스치는 빛은 외벽 파사드 위에 섬세한 결을 그려냈고, 밤에는 업라이트 조명이 이 결을 다시 드러내며 하루의 시간 흐름이 건축에 투영된다.
입구조차도 평범하지 않다. 건물 정면이 아닌 측면을 돌아 들어가야만 하며, 이는 일종의 감정적 여정으로 작용한다. 공간 진입은 물리적 이동을 넘어, 감각의 전환을 유도하는 과정이다.
유랩은 클라이언트에게 분명히 말했다. “굳이 친절하지 않아도 됩니다. 불편함이 있어도 괜찮습니다.” 이 공간은 서비스 공간이 아닌 자기 내면을 마주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래픽 북스토어는 ‘따로 또 같이’라는 컨셉으로 설계되었다. 연인이 함께 방문하더라도, 각자의 자리에서 침묵 속에 책을 읽는 공유된 고요를 경험할 수 있는 구조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건물 진입부의 50cm 틈, 그리고 그 너머로 흘러나오는 빛과 소리. 사람들은 그 틈을 마주하며 ‘들어가도 되는 걸까’ 잠시 머뭇거리게 되고, 이 당혹감은 곧 호기심과 몰입으로 전환된다.
특히 개인적 취향에서 비롯된 요소들도 섬세하게 녹아 있다. 유랩의 디자이너는 계단에 앉아 책 읽는 것을 좋아했고, 이를 반영해 한국 전통의 멍석 같은 방석을 깔아두었다. 이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사용자의 습관과 감각을 배려한 장치다. 또한 이 건물은 단순한 수직적 3층 구조가 아니다. 램프(ramp) 구조를 통해 수평적 흐름이 유지되며, 사용자는 2층과 3층을 오르내리는 동안에도 단절되지 않은 연결감을 느끼게 된다.
앞서 언급했듯, 요즘 사람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공간은 단순한 기능적 공간이 아니라, 이른바 ‘유휴의 공간’이라 표현할 수 있다. 무언가를 꼭 하지 않아도 되는, 머물 수 있는 여유를 허용하는 공간. 그리고 바로 그 공간에서 얼마나 오래 머물 수 있는가, 다시 말해 체류 시간이 얼마나 길어지는가에 따라 공간의 가치가 결정된다. 이 점은 오늘날 공간 설계에서 매우 중요한 포인트다. 이번 프로젝트 역시 처음 시작은 어찌 보면 취향이 비슷한 어른 둘이 만들어낸 실험적 공간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시간이 지나면서 이 공간이 지닌 가치와 가능성, 그리고 새로운 유형의 라이프스타일을 담아낼 수 있다는 점이 더 크게 다가왔다. 그래서 오늘 이 사례를 소개하게 된 것이다.
GRAPHICS Wirye - 그래픽 위례
첫 번째 그래픽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완성한 이후, 여러 기업들로부터 다양한 제안을 받게 되었다. 대신증권은 위례에 하나의 공간을 조성해 놓았으나, 오랫동안 비워진 채 방치된 홀이 있었다. 이에 우리는 “그렇다면 이 공간을 단순한 빈 공간으로 두기보다는, 젊은 세대가 체류할 수 있는 공간으로 재구성해보자. 그렇게 함으로써 브랜드의 이미지 역시 더 젊고 유연하게 변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하며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번 프로젝트는 ‘그래픽 스탠다드’라는 기본 개념을 바탕으로 공간을 기획했고, 공간은 1층과 지하 1층으로 구성되었다. 우리는 먼저 가구에 대한 실험부터 시작했으며, 그래픽 스탠다드형 가구를 새롭게 개발하는 데 주력했다.
GRAPHIC Wirye (©강민구 작가) GRAPHIC Wirye (©강민구 작가) 초기에는 비행기의 퍼스트 클래스 좌석을 연구했다. 두 번째는 정밀한 디테일이 요구되고, 전자 기기가 작동해야 하며, 섬세하면서도 럭셔리한 사용감을 제공해야 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럭스한 형태로 만들어야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편하게 발을 올리거나 양반 다리도 할 수 있고, 편하게 누워서 볼 수 있는 의자를 기획했고, 비행기 1등석에 사용된 좀 럭스한 형태의 2인용 대형 가구를 만들게 됐다. 이 가구는 퍼스트 클래스의 프라이빗함과 편안함을 일상 공간으로 확장한 시도였다.
입구의 외장재에는 앞서 진행했던 이태원 그래픽 프로젝트에서 사용한 내외장재를 그대로 활용했다. 이를 통해 그래픽 프로젝트만의 정체성과 디자인 언어의 연속성을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공간에서의 확장 가능성을 자연스럽게 보여주고자 했다. 공간의 동선은 비교적 단순하고 직관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1층에서는 음료나 가벼운 식사거리를 선택할 수 있고, 이후 지하로 내려오며 본격적인 체류 공간으로 이어진다. 지하 공간은 책을 읽거나 머무를 수 있는 장소로 계획되었으며, 전체를 계단 형태로 구성해 이용자들이 자유롭게 앉거나 기대어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했다. 이 계단 구조는 기존 건축적 요소를 그대로 활용한 공간이기도 하다. 우리는 여기에 ‘그래픽 스탠다드’ 가구 시스템을 덧입혀, 소극장 혹은 작은 극장 같은 감각적인 체험 공간으로 재해석했다. 또한, 원래 무대 뒤편의 준비실로 사용되던 공간은 영상 장치와 천장 미러솔 등을 활용해, 완전히 다른 차원의 공간처럼 연출했다.
MAYBELL - 오월의 종 빵집
우리는 스스로 파인아트 영역에 있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사실 파인아트를 매우 좋아하고, 또 그곳에 뿌리를 두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번 프로젝트는 ‘도자기’와 ‘빵’이라는 두 개의 공장, 즉 전혀 다른 두 가지의 시간성과 물성을 지닌 매체를 연결하는 작업이었다. 이 프로젝트의 핵심은 ‘시간이 구워낸 공간’이라는 개념이었다. 클라이언트가 내민 노트에는 10여 년 넘게 빵집을 운영하며 쌓아온 철학과 신념들, 그리고 직접 손으로 그린 수많은 스케치들이 담겨 있었다. 그 순간 우리는 단순한 상업 공간이 아닌, 정체성과 기억이 응축된 장소를 만들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이 프로젝트는 단순한 설계가 아니라, 대표님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오랜 시간 브레인스토밍을 거치며 ‘이 공간을 어떻게 만들까?’를 함께 고민하는 것에서 출발했다.
빵집이라는 것은 베이커리(BAKERY, 시간이 지나도 그 자리에 있는 빵집), 베이커(BAKER, 동일한 시간의 행위를 반복하는 사람), 베이크드(BAKED, 시간의 결과가 담긴 빵), 베이킹(BAKING, 기다림의 시간을 담는 과정)으로 계속해서 시간성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이런 일련의 단어 속에 깃든 시간성의 층위를 들여다보며, 베이커리라는 공간이 단순한 상업 시설이 아니라 시간이 흐르는 과정을 담아내는 일종의 공장이자 기억이 쌓이는 장소라는 인식을 갖게 됐다. 대표님의 노트 속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다. “오랫동안 시간의 흔적이 남아 있는, 당신의 마지막 빵집을 지어달라.” 이 문장이 우리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시간이 담긴 빵집’이라는 컨셉으로 접근하게 되었다.
결국에는 ‘우리가 공간의 시간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들이 무엇이 있을까?’를 고민해 보면,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다. 그중 녹이 슬어 가는 것, 시간을 구워서 만든 소재인 벽돌처럼 시간성을 가지고 공간의 소재를 만드는 것, 그리고 질감이나 형태들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영상에서 시간이 천천히 흐르면서 빛이 움직이는 과정들을 보여줬을 때, 우리는 ‘시간을 공간에서 표현할 수 있는 요소’라고 생각했다. 이에 마지막으로는 시간이 담긴 분위기들을 보여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오월의 종 빵을 드셔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굉장히 검박하고 검소한 빵이다. 뭔가 화려하거나 여러 가지 크림이 들어있는 빵이 아닌, 식사빵 위주의 사우도우를 판매하는 곳이다.
MAYBELL (©강민구 작가) 우리는 약 60평에 불과한 작은 대지에서 매우 심도 있는 연구를 진행했다. 창립 이래 하루도 빠짐없이 오전 11시에 문을 열고, 그 시각에 손님들이 줄을 서서 빵집 입구로 들어오는 상황을 관찰했다. 이에 따라 나는 먼저 오전 11시에 들어오는 빛의 방향을 면밀히 파악했다. 그리고 그 빛이 들어오는 방향에 맞추어 건물을 분절하고, 손님과 빛이 동시에 유입될 수 있도록 공간을 계획했다.
사실, 60평이라는 협소한 부지에 건물을 세우면 규모가 매우 작아 보일 수밖에 없다. 이에 우리는 도넛 형태의 구조를 적용하여 중심부를 비우고, 외곽을 최대한 확장하는 설계를 택했다. 또한, 빵과 공간에 집중하기 위해 창문을 최소화하고 중정을 설치하여 내부로 빛이 자연스럽게 들어오도록 했다. 특히 오전 11시 방향으로 빛이 집중되도록 해당 부분을 절개하여, 손님과 빵이 동시에 입장할 수 있는 동선을 마련한 점이 이 프로젝트의 특징이다.
그다음, 소재에 관한 부분에서도 다채로운 실험이 이루어졌다. 우리는 ‘시간이 담긴 소재’와 ‘시간이 담긴 부분’에 의미를 두고자 김무열 작가와 협업했다. 김무열 작가는 손자국을 이용해 도자기를 빚어내는 작업 방식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함께 다양한 샘플을 제작하며 건축에 적용할 소재를 개발했다. 특히 손자국의 텍스처를 어느 정도 깊게 표현할지, 혹은 덜어낼지를 논의하며 진행하였고, 건물에 빛이 비칠 때 손자국 텍스처가 자연스럽게 드러나도록 연출했다. 결과적으로 건물 외장재는 김무열 작가의 세라믹 작품으로 구성되어 건물 전체에 독특하고 세련된 분위기를 부여했다.
MAYBELL (©강민구 작가) 비록 현재는 널리 알려져 있지만, 창업 초기에는 사우도우 빵이 대중에게 다소 생소하게 느껴졌다. 건강한 식사빵이었으나 약간의 신맛 때문에 일부 고객은 빵이 상했다고 판단해 반납하는 경우도 있었다.
빵이 나오는 오전 11시마다 종을 흔들며 빵이 나왔음을 알렸는데, 그 모습이 매우 의미 있게 다가와 현재는 그 종을 건물 외벽에 설치했다. 현재는 종을 직접 치지 않아도 많은 손님이 줄을 서서 기다리기에, 종은 마치 풍경처럼 가끔씩 달랑거리는 소리만 낸다.
이 프로젝트는 매우 운이 좋게도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Red Dot Design Award) 브랜드 & 커뮤니케이션(Brand & Communication) 부문의 건축 분야에서 대상을 받게 됐다. 18년간 작업해오면서 이처럼 큰 상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매우 기쁘고 뜻 깊었다.
우리는 ‘유랩’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단순한 명칭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소재를 개발하며, 사람들의 행태와 공간 내 행동 양식을 연구하는 데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특히 한국적인 스타일을 공간에 담아내는 데에도 큰 애정을 쏟고 있다. 앞으로의 작업 역시 이러한 기조를 바탕으로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나갈 예정이며, 아직 부족한 점이 많지만 끊임없이 연구하며 노력하고 있으니 많은 응원과 관심을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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