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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전이서의 timeless 디자인카테고리 없음 2026. 6. 3. 08:59

Timeless, Typeless:
작은 공간이 획득하는 시간의 면역력모든 물리적 공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시간의 풍화를 겪지만, 메디컬 공간의 생명력은 유독 그 주기가 짧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트렌디한 마감재와 의료 장비의 진화 속에서, 대다수의 중소 의원들은 개원 후 불과 몇 년 만에 시각적 노후화를 마주하곤 한다. 특히 한 번 자리를 잡으면 이전이나 구조 변경이 극도로 어려운 의료 공간의 특성상, 인테리어의 휘발성 유행에 기댄 공간은 건축주에게 시간이 흐를수록 무거운 짐이 되기 마련이다.
그 고정관념을 보란 듯이 깨부순 자그마한 증거가 있다. 지난 2004년, 4.3m x8.1라는 극단적으로 협소한 치수 안에서 태어난 불과 11.5평의 치과 의원. 강산이 두 번 바뀌고 유행의 조류가 수없이 교차한 지금까지도, 이 공간은 단 한 번의 디자인 변경 없이 원형 그대로 여전히 단단하게 작동하고 있다. 이동할 수 없고 확장할 수 없는 제약 속에서, 이 작은 공간은 어떻게 이토록 긴 영원성(Timeless)을 획득할 수 있었을까.



이 프로젝트가 시간의 풍화를 이겨낸 비결은 병원다움의 정형화된 틀을 깨부순 **‘타입리스(Typeless)’**의 접근에 있다. 흔히 메디컬 공간이라 하면 연상되는 차갑고 일률적인 백색의 강박에서 벗어나, 본질적인 조형성과 재료의 은유적 표현에 집중한 것이다.
파사드에 적용된 폴리카보네이트는 유리처럼 내부를 투명하게 날것으로 드러내는 대신, 빛을 부드럽게 굴절시키며 외부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실루엣으로 머금는다. 이는 반투명한 벽면을 통해 좁은 공간에 시각적 확장감과 은유적 깊이를 동시에 부여하는 장치가 된다. 자칫 지나치게 현대적이거나 가벼워 보일 수 있는 반투명 매스는 따뜻한 원목 프레임으로 정교하게 감싸 안아 공간의 무게중심을 단단히 붙잡았다. 내부와 외부를 단절시키지 않고 유연하게 소통하게 만드는 외피의 재해석이다.
"최소한(미니멈)이란 어떤 인공물이 더 이상 빼는 것으로는 개선이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렀을 때 도달하는 완벽함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는 물성, 모든 부품, 모든 디테일, 그리고 모든 접합부가 본질적인 요소로 축소되거나 압축되었을 때 오브제가 지니게 되는 품질이다."
_John Pawson내부 공간 역시 장식적 요소를 철저히 걷어내고 ‘음과 양의 매스(Mass)’라는 건축 고유의 본질로 채워졌다. 바탕이 되는 지극히 미니멀한 화이트 진료실 공간 안에, X선실을 품은 직육면체 형태의 ‘블랙 코르텐(Corten) 코어’를 과감하게 삽입했다. 이 극적인 대비는 공간의 시각적 긴장감을 조율하는 동시에, 11.5평이라는 한계를 잊게 만드는 밀도 높은 구조미를 완성한다. 대기실부터 진료실까지 하나의 선형으로 이어지는 고풍스러운 화이트 워시 오크 천장은 분절된 공간들을 하나로 묶어주며, 환자가 병원에 들어선 순간부터 진료를 마치고 나갈 때까지 정서적 안정감을 유지하도록 돕는 결정적 역할을 수행한다.
이처럼 본질에 집중한 디자인은 예상치 못한, 그러나 건축가로서 가장 짜릿한 공간의 사회적 효과를 불러왔다. 대개 동네의 작은 의원들은 환자들이 찾아와 관습적으로 치료비를 흥정하거나 ‘딜(Deal)’을 시도하는 특유의 소란스러움을 겪곤 한다. 공간이 주는 심상과 신뢰감이 가벼울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러나 리노베이션 이후, 이 병원에는 치료비를 흥정하는 환자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고 기뻐하던 원장님의 흥분되던 목소리를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공간의 밀도가 높아지자 환자들은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이곳을 단순한 ‘상업적 점포’가 아닌, ‘품격 있는 전문 의료 공간’으로 직관적으로 인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디자인이 환자의 태도와 가치 인식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순간이자, 공간이 인간의 행동을 어떻게 규정하고 보호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완벽한 방증이었다. 개원 후 원장님이 보내오신 깊은 감사의 인사는 마감재의 수명보다 강력한 ‘디자인의 유효기간’을 확인시켜 주었다.
처음 이 협소한 공간을 마주했을 때는 ‘이 좁은 곳에서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아득함이 앞섰었다. 유동인구가 많은 복잡한 상가 내부라는 환경, 손바닥만 한 실측 규모는 디자인적 변화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뺄 수 있는 모든 것을 빼고 본질만 남기는 미니멀리즘의 직관을 끝까지 밀어붙였을 때, 비로소 유행의 흐름 바깥에 존재하는 절대적인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2004년에 뿌린 건축적 씨앗이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변함없이 푸르게 숨 쉬고 있는 모습은 건축가에게도 깊은 울림을 준다. 좋은 디자인은 스스로 시간의 면역력을 증명해 낸다. 규모의 한계를 뛰어넘어 미니멀리즘의 정수를 투영할 수 있도록 건축가의 시선을 믿고, 그 공간을 긴 세월 동안 변함없이 아끼고 가꾸어 주신 원장님의 깊은 혜안과 신뢰에 깊은 경의를 표한다.
■ 프로젝트 개요
프로젝트명: 문 박사 치과
설계 및 디자인: 전아키텍츠
위치 : 서울 종로구 당주동
총 바닥면적: 34.32 m²
사진: 김재윤작가글. 전이서 (전아키텍츠)
https://chunarchitect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