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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우 건축가의 '함께 떠나고 싶은 그곳'] 덴마크 오르후스volume.14 2021. 9. 2. 12:13
덴마크 오르후스
지난달은 여름휴가를 폭염과 함께 보냈다. 기후변화로 뜨거워진 지구는 쉽게 식지 않아서 그런지 아직은 한낮의 더위는 지속되지만 아침저녁 열린 창문으로 넘나드는 상쾌하고 서늘한 기운으로 여름 퇴각을 예감한다. 기승을 부리는 코로나 때문에 해외여행은 꿈도 못 꾸지만 떠나고 싶은 장소 중에 오르후스라는 도시를 추억해본다.
덴마크 하면 누구나 수도 코펜하겐을 떠올리지만, 오르후스는 코펜하겐에 이어 덴마크의, 제 2 도시로서 교육 중심의 도시다. 도시의 경쟁력은 인구 규모나 크기라는 선입견을 품을 경우 이 도시는 순위에서 밀리지만 문화와 예술, 환경, 디자인 등, 높은 안목과 수준의 시민의식으로 본다면 단연코 높은 점수를 받을 만하다.
오르후스 시청사
건축디자인의 수준 역시 우리보다 적어도 한 수 위라는 사실은 몇 개의 건축 답사로 증명된다. 우선 시내 중심에서 랜드마크 역할을 하는 1940년대에 지어진 시청 건물을 답사해보자. 평범한 외관이지만 수직적인 종탑은 시민들을 위한 시계탑으로도 활용되는데 멀리서도 인지되므로 어디서든 자신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어서 편리하다. 하지만 정작 건축가 자신은 시의 요구사항을 수용하면서도 수직적인 모티브를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다는 후문이며 준공 후에도 종탑의 꼭대기 층에는 절대 올라오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이 고집 센 건축가는 덴마크가 자랑하는 아르네 야콥센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건축 이외에도 가구, 조명, 수전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직접 디자인하며 토탈 디자인을 추구했다. 대리석으로 마감한 건물 외관은 단순하지만, 건물의 구조와 기능이 합리적이며 부분적으로 오브제 같은 낭만적인 원형 계단도 활용하며 명쾌한 동선계획과 융통성이 있는 가변적 평면을 구성했다. 바우하우스가 건축의 이념을 이끌던 시대에 거장의 탁월한 건축은 명실공히 마스터피스로 역사에 남아 멀리 이방의 나라에서 온 건축가를 겸허하게 만든다.
항구 주거단지
바다에 접해있는 도시니만큼 최근 지어지고 있는 항만 부근의 건축 디자인은 더욱더 혁신적이고 도전적이다. UN studio, BIG같이 내로라하는 세계적인 건축가 그룹들이 참여해서 새롭게 집합 주거들을 완성했거나 공사 중인데 외관은 각 블록마다 독특한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있다. 조형, 외장재료, 색상 등 각자의 개성이 강하니 전체의 통일감은 실종된 상태다. 그렇다면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그냥 조화롭지 않다고 해야 할까? 아니다. 블록마다 분명한 조형 언어를 가지고 서로 다른 어휘로도 충분히 잘 어울리고 있다. 그것은 마치 건축박람회장처럼 대비를 통한 팽팽한 긴장감으로 무미건조하기 쉬운 공동주택의 단지에 에너지와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빙산처럼 희고 삐죽삐죽한 외관으로 '아이스버그(Ice Berg)'라는 별명이 붙은 건축, 마치 계단처럼 상부로 갈수록 매스가 작아지며 후퇴된 건축 등, 건축과 학생들의 졸업 전에서 본 듯한 과감하고 다양한 볼거리들이 실현되어 방문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눈을 즐겁게 해준다. 이처럼 특색이 다양한 건축들에서 단 하나의 공통점을 찾으라고 한다면 외부 발코니다. 기후로 따진다면 우리네보다 더 좋을 것도 없는데 세대마다 캔틸레버 구조의 넉넉한 발코니를 두어 그곳에 작은 티테이블과 편한 의자, 간단한 소품과 화분 등을 활용하여 집주인의 취향에 따라 여유와 센스가 돋보인다. 지금처럼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는 자연을 접하는 외부공간이 절실한데 우리처럼 발코니 확장으로 내부면적을 조금 더 확보하려는 편익중심의 사고도 점진적으로 변화하게 될 것이다.
수변 산책로
인근 해변에 위치한 커다란 써클의 목제 수상 산책로, Infinite Bridge는 설치미술에 가까운 구조물이다. 특별한 기능은 없지만 시원한 바람과 함께 맑은 바다 위를 걷는 기분은 색다르다. 아이를 유모차에 태워 나무로 만든 데크 위를 여유롭게 산책하는 젊은 부부들의 모습이 정겹다. 안전을 위한 난간조차 없는데 잘 활용되니 신통할 따름이다.
Dokk1 도서관 & ARoS 미술관
민간건축을 답사했으니 이제 도서관, 미술관 등 공공 건축을 보자. 두 건물 모두 슈미트 햄머 라센 아키텍츠 그룹이 설계했다. 우선 Dokk1이라는 도서관은 조형 언어부터 독특하다. 분명히 평면은 정방형의 간단한 형식으로 출발했는데 각 층별 외부 데크는 사선으로 뻗어 나가며 독특한 조형의 아우라를 뿜어낸다. 펀칭메탈을 사용한 외부와 내부의 마감 재료가 같아 안팎의 경계도 모호하지만, 내부로 들어오면 오픈스페이스와 계단형 전시나 열람공간을 두어 층 개념 역시 모호하다. 자유로운 독서와 공부에 열중하는 시민들은 그룹스터디, 개인몰입이나 전망이 좋은 대형유리의 창가에 앉아 휴식을 취하며 인터넷 서핑 등 자신이 선택한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 도서관을 즐기고 있다. 어린이와 중고생을 위한 전용공간들도 매우 창의적이다. 교육과 놀이가 결합된 합성어 에듀테인먼트(Edu-tainment)가 떠오르는 적합한 장소다. 외부 데크에는 예술조형물들이 전시되어 있어 바다 조망과 함께 문화 산책이 가능하다.
ARoS 미술관은 시청 근처에서 가깝다. 52m*52m의 정방형 평면으로 붉은 벽돌로 구성된 견고한 외관은 매우 단순한데 머리 위에 독특한 색상의 원형 프레임을 얹고 있어서 인상적이다. 자세히 보면 그 묘한 프레임 안에는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어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름하여 '레인보우 파노라마(Rainbow Panorama)'라는 올라퍼 에리아슨의 설치미술 작품으로 미술관의 하이라이트다. 복도 폭 3m, 지름 52m, 둘레길이 150m, 원형 밴드는 무지개 색상의 컬러 유리로 마감되어 현란한 판타지 속에서 오르후스의 도시 전체 360°를 조망할 수 있다. 도시에 색과 아름다움을 덧입혀 써클을 한 바퀴 도는 동안 초현실 같은 체험이 가능한데 가히 신비롭고 감동적이다. 건축과 미술의 경계에 서 있는 공공 설치미술은 걷는 사람들조차 설치미술의 움직이는 한 부분으로 존재한다.
이 작품은 미술관 완공 후 공모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된 안이라고 한다. 미술관을 방문한 시민이나 관광객들에게도 가장 인기가 많으며 도시 전망대의 완벽한 역할을 해내고 있다. 자세히 관찰해보니 바닥과 천장의 작은 틈새가 있다. 공기가 아래로 들어와서 위로 나갈 수 있도록 설계한 디테일이 건축가의 눈에 직업병처럼 포착되는 법이다. 기압을 활용한 자연통풍 장치는 냉난방이 없는 실내공간에 환기와 더불어 실내외 온도 차이를 줄여 유리에 결로가 생기는 것을 막고 있다.
이 미술관의 내부공간은 마치 뉴욕의 구겐하임처럼 8층 전체가 오픈되어 백색의 내부공간 벽면에 자연채광이 쏟아진다. 계곡처럼 깊은 공간이지만 다양한 곡면으로 구성된 아트리움은 경쾌하고 춤을 추듯 역동적이다. 층별 전시관에서는 오크밸리의 뮤지엄 산에서 보았던 제임스 터렐의 빛을 활용한 설치미술과 하이퍼 리얼리티 기법으로 거대한 조각 작품을 만드는 론 뮤크의 BOY 등, 현대미술 작가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이 도시는 뛰어난 디자인으로 문화와 예술이 결합하고 역사적인 사례의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며 잘 어우러져 있다. 항구 쪽에 새롭게 지어지는 현대 건축디자인도 뛰어나지만 4~5층 규모의 나지막한 시내의 건물들은 역사성을 보존하고 있어 친근하다. 고전적인 르네상스 건축어휘의 외관과 뻐꾸기 창을 가진 지붕들로 조화를 이루고 있어 찍는 사진마다 엽서처럼 그림이 된다. 수로를 중심으로 하여 성당과 상가로 이루어진 보행자 전용 거리는 걷고 싶은 가로를 형성한다. 걷다가 쉬고 싶으면 이름 모를 카페에 들러 맥주 한 잔으로 피로를 달래고 답사 소감으로 수다를 떠는 일도 나중에는 추억이 되겠다.
오르후스. 발음하기도 기억하기도 어려운 이름을 가진 덴마크의 도시지만, 고층빌딩 하나 없는 저밀도의 도시에서도 건져갈 풍경들은 의외로 풍부하다. 투숙한 호텔의 작은 객실에서 창밖으로 보이는 빈티지한 벽돌집들의 풍경도 빼놓지 않고 스케치북에 담아서 오르후스 방문의 기억으로 남기고 싶어진다. 비록 짧은 여정이었지만 나에게는 스토리텔링과 다양한 콘텐츠가 있는 도시로 기억될 것이다.
글/그림. 임진우 (건축가 / 정림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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