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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우 건축가의 '함께 떠나고 싶은 그곳'] 역사와 자연이 공존하는 땅, 철원ARTICLE 2026. 11. 3. 17:32
역사와 자연이 공존하는 땅, 철원
몇 달 전에 철원을 다녀왔다. 서울 북부의 의정부와 포천, 전곡을 지나 더 북쪽으로 가보기는 처음이었다. 가는 도중 이정표에 이름도 익숙한 산정호수가 보였다. 아주 오래 전 회사 소모임에서 산정호수에 와 본 적은 있지만 이름 만 생각나는 정도이고 주변 환경은 별로 기억나지 않는다. 답사하기로 한 한탄강 주상절리길은 그보다 더 북쪽으로 올라가야 한다.

그림1 철원 고석정1 강원특별자치도 철원은 한반도의 중심부에 자리하여,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격동하는 한국사의 흔적과 경이로운 자연이 공존하는 특별한 지역이다. 철원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후삼국 시대 궁예가 세운 태봉국의 수도(철원성)가 있던 곳이다. 일제강점기에는 근대 교통과 경제의 중심지로 크게 번성했다. 1914년 경원선 개통과 금강산 전기철도의 분기점이 되면서 인구 8만 명이 넘는 강원도의 3대 도시이자, 물류·상업·금융의 허브 역할을 했다.
이후 철원은 6·25 전쟁 당시 치열한 격전지였다. 특히 철원, 김화, 평강을 잇는 '철의 삼각지대'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백마고지 전투 등 가장 참혹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현재는 민간인 통제구역(DMZ)과 인접하여 분단의 현실을 생생히 느낄 수 있는 역사적 공간으로 남아있다.

그림2_철원 드르니마을의 두루미교 
그림3한탄강 주상절리길1 
그림4 _한탄강 주상절리 길2 
그림5 한탄강 주상절리길3 우리가 철원에서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자연의 웅장함과 아찔한 스릴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한탄강 주상절리길이다. 드르니 마을에서 출발하여 순담 게이트까지 한탄강 절벽을 따라 허공에 매달린 3.6km의 잔도(棧道)를 걷는 코스로, 발아래로 훤히 내려다보이는 격자형 철제 바닥과 유유히 흐르는 한탄강이 짜릿한 긴장감을 선사한다. 아직은 덥지 않은 계절, 눈이 부신 5월의 신록이 나무와 숲에 가득하다. 이 곳은 지질학적으로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의 가치를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는 '지질학적 교과서'와 같은 곳이다. 적절한 간격으로 배치된 쉼터 중에서도 특히 순담 스카이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물줄기와 기암절벽의 조화는 압도적 풍경으로 산수화가 따로 없다. 공중에 매달린 다리를 건너기도 하고 경사를 따라 오르락 내리락하는 계단을 밟으며 운동량을 증가시킨다. 조금 힘들어도 반대편 주상절리 절벽이 보여주는 경관에 매료되어 연신 이마에 땀을 닦으며 산책로를 걷는다.

그림6 철원 고석정2 
그림7 _고석정3 
그림8 고석정4 멀지 않은 곳에 자연이 빚어낸 웅장한 예술작품 같은 고석정이 있다. 오랜 세월 동안 형성된 한탄강 협곡과 기암괴석이 마치 제주도의 주상절리를 육지로 옮겨놓은 듯 신비로운 풍경을 자랑한다. 조선시대 의적 임꺽정이 은거하며 활동했던 장소이자,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의 배경이 된 곳이다.
절벽 위에서 내려다보던 고석정을 강물 가까이에 내려와서 다시 올려다보면 깎아지른 웅장한 바위와 맑은 강물이 어우러져 한 폭의 전통적인 산수화를 감상하는 듯한 특별함을 선사한다. 처음 보는데도 이 풍경이 익숙한 이유는 많은 동양화가들의 그림에 등장하는 장면이라서 그런가보다.

그림9 철원 역사 
그림10 _철원 역사문화공원 북쪽으로 조금 더 이동하면 복원된 철원역과 철원역사문화공원이 있다. 철원역사문화공원은 1930년대 번성했던 철원역 주변의 거리를 재현해 놓은 장소다. 근대 철원의 화려했던 시절과 아픈 역사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의미 있는 공간으로 마치 영화 세트장에 발을 디딘 듯한 착각이 든다. 지금은 민통선 인근의 조용한 접경 지역이지만, 당시 철원이 강원도에서 가장 인구가 많고 번화했던 중심지였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
재현된 거리를 천천히 걸으며 당시의 병원, 우편국, 여관, 극장 등을 둘러본다. 자세히 보니 외관만 흉내 낸 것이 아니라 내부 소품까지 디테일하게 꾸며져 있어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곳은 화려했던 과거의 번영과 전쟁의 상흔, 그리고 분단의 현실이 묘하게 교차하는 곳이다. 과거의 재현을 넘어, 언젠가 남북의 사람들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미래를 상징하는 듯해 뭉클함을 느끼게 한다.

그림11_철원 노동당사1 
그림12 철원 노동당사2 특히 도로 건너편에 외롭게 존재하는 노동당사는 우리가 잊고 지내던 현대사의 아픈 단면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등록문화재 22호인 노동당사는 해방 후 한국전쟁 전까지 공산 치하 5년 동안 북한이 철원, 김화, 포천 등을 비롯한 이북인 평강 일대를 관리하던 당사이다. 한국전쟁 당시 폭격을 받아 지금은 뼈대 만 앙상하게 남아있다. 자세히 보면 포탄과 총탄 자국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회색 콘크리트 건물은 전쟁의 참상을 웅변한다. 이념의 대립과 민중의 아픔을 보여주는 이 공간은,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아야 한다는 묵직한 '평화의 메시지'를 던지는 교육의 장이다.
이번에 철원을 답사하며 느낀 점은 국내에도 가 볼만한 곳이 많다는 사실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를 배분하는 나만의 필터가 정교해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해외여행이 언제부터인가 부담스러워지고 낯선 이국땅으로 향하는 설렘의 이면에 묵직한 귀찮음이 먼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해외여행을 가기 위해 치러야 하는 필수 과정들은 항공료, 체류비 등 뿐 만 아니라 이제 꽤 큰 체력적, 심리적 비용을 요구한다. 공항으로 향하는 길부터 시작해, 삼엄하고도 지루한 보안검색대를 통과하고, 탑승구 앞에서 끝없이 대기하는 시간, 그리고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해서도 입국심사대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을 버텨내는 일. 비행기 트랩에 오르기도 전에 이미 몸과 마음의 에너지는 절반쯤 방전되곤 한다. 이 모든 번잡함을 무릅쓸 만큼 그 낯선 땅이 내게 절대적인 위안을 줄 것인가에 대해, 최근의 나는 점차 회의적이 되어 간다.
이제 눈을 돌려 우리 땅을 바라본다. 굳이 비행기 표를 끊고 시차를 견디지 않아도, 우리나라에는 해외 명소 못지않게 아름다운 풍경과 깊은 이야기를 품은 곳들이 차고 넘친다. 굽이치는 능선의 미학, 오랜 세월을 버텨온 공간이 품은 지역의 역사와 고유의 스토리, 그리고 이제는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뒤처지지 않는 훌륭한 편익시설과 머묾의 공간들까지. 멀리 가지 않아도 시선이 닿는 곳마다 새로운 발견의 기쁨이 기다리고 있다.

익숙함 속에 숨어 있는 낯섦을 찾아내는 것이야말로 진짜 안목이 아닐까. 해외의 화려한 랜드마크를 '관광'하는 것보다, 우리 국토의 구석구석을 찬찬히 거닐며 그 땅의 맥락을 짚어내고 사유하는 '답사'가 지금의 내게는 훨씬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장거리 비행의 피로 대신, 차창 밖으로 서서히 변하는 국내의 풍경을 음미하며 여유롭게 떠나는 길이 편하고 점점 선호하고 싶어진다. 나는 앞으로 해외로 향하는 먼 길 대신, 아직 발길이 닿지 않은 국내의 여러 여백을 찾아 나서려 한다. 지도를 펼치고 가보지 못한 낯선 지명을 손 끝으로 더듬어 본다. 여권에 찍히는 도장 대신, 우리 땅이 주는 깊고 편안한 위로가 좋고 편하다.
이번 철원 답사를 통하여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고 역사적 유산을 답사하는 일석이조의 효능감을 체험했다. 특히 역사는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준다는 점을 다시금 깨닫게 해준다. 특히 분단의 아픔을 간직한 철원역과 노동당사가 앞으로는 갈등과 상처의 공간을 넘어, 평화와 화합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기를 바란다.

글/그림. 임진우 (건축가 / 정림건축)
한국의료복지건축학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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