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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우 건축가의 '함께 떠나고 싶은 그곳'] 답사 옴니버스 6편카테고리 없음 2025. 11. 3. 06:32
가평 아난티 코드
숲의 품에 안겨 시간마저 느리게 흐르는 듯한, 정신의 피난처다.




복닥거리던 서울을 벗어나 가평 설악 IC로 나와서 아난티의 깊은 숲길을 따라 들어서면, 어느 순간 세상의 소음은 잦아들고 맑은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드는 것을 느낀다. 아난티는 자연의 지형을 거스르지 않고 그 속에 겸손하게 자리 잡은 듯하다. 골프시설과 숙박시설이 자연 속에 잘 어우러져 있는 이 곳은 건축가 민성진의 작품이다. 건물들은 웅장함보다는 정제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으며, 창밖으로는 수령 80년 이상의 잣나무들이 빚어내는 푸른 장막이 펼쳐진다. 이곳은 숲이 은밀하게 건네는 맑은 언어의 초대장과 같다.





골프 코스는 그저 운동을 위한 공간이 아닌, 자연의 지형을 그대로 살린 거대한 예술 작품이다. 골프 손님들은 공에 집중하려 해도 시선을 사로잡는 자작나무와 호수의 풍경은 잠시 시간을 멈추게 한다. 아난티 코드가 지향하는 '느림의 미학'은 이 모든 공간에 스며들어 있다. 가평 아난티 코드에서의 답사는 단순히 시설을 이용한 것을 넘어, 깊은 숲속에서 나를 재발견하고 재충전하는 특별한 체험이다. 이곳의 공기, 빛, 물, 그리고 고요함이 오랫동안 기억 속에 치유의 언어로 남을 것 같다.
산행
날씨가 선선해진 요즘, 주말이면 서울에 등산복 패션이 넘쳐난다. 가까이에는 인왕산, 남산부터 북한산, 도봉산 등, 경관이 수려한 산들이 서울 주변을 감싸고 있으니 인근 주민들과 서울시민은 행복하다. 그 산 속에 씨줄과 날줄처럼, 여러 갈래로 짜여진 등산로와 둘레길이 있어서 언제나 마음만 먹으면 산행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수도 서울은 이런 이유만으로도 국제적으로 경쟁력이 있는 도시임이 분명하다.






산은 같은 등산로라도 사계절 모두 다녀볼 만 하다. 특히 눈 덮힌 겨울 산은 적요해서 좋다. 산을 다녀온 날이면 몸은 조금 피로하지만 하루 종일 정신은 맑다. 산행 후 샤워를 하고 나면 무슨 일이든지 하고 싶은 의욕이 샘 솟는다. 반면에 소파에 퍼져서 TV를 보며 하루 종일 리모컨만 만지작거리며 소모적인 하루를 보냈다고 상상해 보시라. 이렇게 휴일을 보내고 월요일에 출근하면 재충전은 고사하고 몸은 천근만근 무거운 채, 정신은 월요병에 결박당하고 말 것이다.





그래서 주말이 되면 가급적 가벼운 배낭을 챙겨서 집을 나서려고 한다. 여럿이서 가는 날도 있지만 혼자서 산을 오르면 계곡물과 산새들의 소리에 더 집중할 수 있다. 신선한 공기와 나무를 흔드는 바람 속에서 사유와 성찰의 시간을 보내며 묵묵히 산을 오르다 보면 반드시 정상에 도달하지 않아도 괜찮다.
“하여 친구여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 바로 지금 여긴지도 몰라....” (김민기)
“온 산에 하얗게 눈이 내린 날 나는 나는 산이 될 테야....” (이정선)
하산 길에는 이미 많은 것들을 비워낸 자신을 발견한다. 스스로 내면과 만나며 걷는 길에서 자연과 합일되는 산행은 어쩌면 혼자이기에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 땀으로 충만한 몸은 재충전되어 새롭게 시작하는 월요일을 맞이할 수 있으니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성균관 명륜당의 은행나무
매년 11월 초중반이면 성균관 명륜당의 은행나무는 진한 노란색으로 변신한다. '서울 가볼만한 곳'을 검색하면 우선순위를 다툴 정도로 핫플이다. 그 때 방문하면 누구나 경이로운 신세계를 체험을 할 수 있다. 명륜당 문을 들어서는 순간, 공간과 시간과 장소는 전혀 다른 주파수의 시간대로 훌쩍 순간이동을 한다. 수령 400여 년의 은행나무들은 조선시대부터 근대와 현대사를 목도하며 이 곳을 지켜온 셈이다. 왠지 판타지 소설 속에 나오는 고목의 정령이 느껴질 법한 굵직한 줄기로부터 거대한 가지들을 하늘로 뻗어 수천 개의 은행잎을 거느리고 있다. 그 노란색 은행잎들이 가을 햇빛을 받으면 파란 가을하늘을 배경으로 황금빛 춤을 춘다. 긴 동안거(冬安居)를 앞두고 한바탕 축제를 벌이는데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만추의 풍경이다.



그러기도 잠깐, 이내 바람이 불고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쏟아지는 날에는 미련 없이 은행잎들을 바닥으로 무참히 떨군다. 방문객들은 마당에 한가득 엎질러진 노란 물감 같은 낙엽들을 밟으며 또 한 번 색상의 감성에 젖는다. 그렇게 긴 세월을 변함없이 한자리에 서서 누구에게나 기쁨을 아낌없이 선물하는 명륜당의 은행나무는 경이롭고 위대하다.
저런 나무를 닮고 싶다.
국립중앙박물관
종종 해외 출장을 가게 되면 그 나라의 박물관과 미술관은 꼭 방문하려고 한다. 특히 박물관은 그 나라와 도시의 역사와 문화 수준을 한눈에 알아 볼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박물관은 용산에 위치한 국립중앙박물관이다. 지난 1995년 설계해서 완공한 정림건축의 대표작으로, 당시 국제현상 공모를 했는데 총 46개국, 860 여 명의 건축가가 참여했고 341개의 출품작 중에 1등으로 당선 되었다.

'거울못'이라고 명명한 전면 대형연못을 끼고 우회하듯 접근하는 보행 동선은 건물을 비스듬히 보면서 목적지와 가까워지는 시퀀스를 유도한다. 서양건축의 기념비적 건물에 있어서 축의 개념, 좌우대칭성, 정면성과는 대비되는 방식으로 우회하며 계단을 오르는 보행 접근 방식은 영주 부석사의 접근처럼 '한국적'이다. 그렇게 오르며 도달한 전면광장은 기대 이상으로 넓은 공간이 펼쳐지는데, '열린 마당'으로 이름한 이 광장은 다목적 활용을 기대하며 비워져 있다. 거대한 박물관 건물 매스의 스케일을 편안하고 넉넉하게 받아주기에 충분하다.
건물 중앙 파사드 오프닝에 남산 서울타워가 픽쳐 프레임으로 풍경화처럼 담기고 야외계단에 자유롭게 앉거나 이동하는 사람들은 하늘을 배경으로 무대에 오른 주인공들이다. 그 계단 위의 사람들을 보고 있자면 그 실루엣 하나 하나가 유명한 고암 선생의 '군상'이라는 그림 같기도 하고 나아가 움직이는 설치미술 같기도 하다. 주말에 가족들과 함께 유익한 나들이 장소로 추천한다.

글/그림. 임진우 (건축가 / 정림건축)
한국의료복지건축학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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