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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Column] 함혜리의 힐링여행 #3volume.40 2023. 11. 1. 22:40
남프랑스 기행 #3
그 자체가 예술 같았던 마을, 생테밀리옹생테밀리옹(Saint-Émilion)은 보르도 와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하고 뛰어난 와인 브랜드이며 생산지역이다. 생테밀리옹은 보르도에서 35㎞에 위치해 거리상 가까울 뿐 아니라 마을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지정될 정도로 아주 특별한 곳이다.
보르도에서 북동쪽으로 40분 정도 달리다가 포도밭 사이로 넓지 않은 길을 따라 들어가면 오래된 종탑을 가진 성당이 나타난다. 테라스에서 아래로 펼쳐지는 파노라마는 이게 생시인가? 하고 눈을 비비게 될 정도로 아름답다. 와인 병에서만 숱하게 접했던 생테밀리옹을 드디어 눈으로 보게 된 순간. 늦은 오후에 도착해 바라본 마을이 너무 아름다워서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던 기억이 새롭다.
경사진 곳에 형성된 마을은 1999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중세에 형성된 이래 르네상스와 현대를 거치면서도 원래의 모습을 훌륭하게 보존하고 있는 덕분이다. 2017년 기준으로 마을 인구는 1874명인데 연간 방문객은 10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생테밀리옹 특별지구는 전체 부지의 67.5%가 포도나무 재배지로 경작 부지의 총면적은 7846 헥타에 이른다. 석회암층이 두드러지고 북쪽으로 가면서 회색 모래와 자갈이 뒤섞인 암석층이 남쪽으로 뻗어있다고 한다. 북쪽 경사면은 완만하고 남쪽 경사면은 도르도뉴 골짜기 쪽으로 급강하하면서 오목한 골짜기를 이루는데 그 골짜기 중 하나에 생테밀리옹 시가 위치한다.
넓지 않은 마을에는 훌륭한 역사적 기념물이 곳곳에 있고, 와인 샵과 식당, 호텔들이 분위기를 돋운다. 자그마한 광장에서 거리의 연주자들의 노래를 들으며 와인을 곁들여 맛있는 식사를 하자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마을 외곽은 포도밭이 대부분이고, 그 안에 수많은 와인 생산자들의 샤토(chateau)가 있다. 샤토는 성(城)이라는 뜻인데 보르도에서는 포도밭과 그 중심에 있는 성을 가진 포도주 생산자를 샤토라고 부르고 있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영주의 저택으로 지어진 것들이 많다. 지역에서 생산되는 석회암으로 지어진 건물은 18세기 중엽부터 19세기 초, 말을 거쳐 20세기 초까지 세워졌다. 미리 예약을 하면 샤토를 방문해서 와인 테이스팅도 하고 저장고를 볼 수도 있다. 호텔을 겸하는 곳도 많다. 나무 그늘 아래에서 드넓은 포도밭을 바라보면서 마치 내 것인 양 상상해 보는 것도 무척 즐거웠다.
생테밀리옹의 역사적 배경은 아주 복잡한데 보르도 와인 애호가라면 알아두면 좋을 것 같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사이트에 소개된 글을 참고해 요약해 본다.
비옥한 아키텐 지역에 포도 재배법을 소개한 것은 로마인들이었다. 로마 점령이 시작되면서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기원전 27년 아키타니아 지역을 건설했다. 부르디갈라(보르도의 옛 지명)의 번영과 함께 발레리우스 프로부스(Valerius Probus)는 275년 군대를 동원해 쿰브리스(Cumbris) 숲을 베어 버리고 최초의 포도밭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지역에 자생하던 비티스 비투리카(Vitis biturica)에 다양하고 새로운 포도 종자를 접붙였다. 라틴문학 시인 아우소니우스(Ausonius)가 4세기에 공직에서 은퇴한 뒤 은거했다는 이곳에는 부유한 저택을 비롯한 로마 점령의 흔적이 상당수 남아 있다.
중세에 포도 재배는 더 활성화되었다. 생테밀리옹 지역은 프랑스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길 위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11세기 이후부터 매우 번성하고 수도원, 교회 등 종교적 역사적 건물들이 많이 세워졌다. 아키텐의 엘레오노르(Eleonore d’Aquitaine)가 루이 7세와 이혼하고 1152년 헨리 플랜태저넷(후에 잉글랜드의 헨리 2세)과 결혼하면서 지참금으로 루이 7세의 영토 소유권을 가져갔다. 생테밀리옹 시는 그때부터 요새화되어 기옌 지방의 모든 도시와 함께 잉글랜드 왕국에 속하게 되었다. 1298년 에드워드 1세는 포도재배 특별 지구의 경계를 정하는 협정에 서명했다. 5년 뒤 필리프 르 벨 치세 때 생테밀리옹은 다시 프랑스 영토가 되었다. 이후 백년전쟁이 지속되는 동안 생테밀리옹의 소유권은 수없이 뒤바뀌었다. 1453년에 완전히 프랑스 영토가 되었다. 그로부터 3년 뒤 샤를 7세는 영국이 갖고 있던 모든 특권을 생테밀리옹에 돌려주어 시가 스스로 재건할 수 있도록 했다. 생테밀리옹은 16세기 위그노 전쟁 때 다시 시련을 겪었으나 18세기에 요새들이 허물어질 때까지 중세의 모습을 유지하게 되었다. 중세의 낡은 질서를 파괴한 프랑스혁명 때 많은 옛 건물들이 파괴되거나 폐허가 되었다. 포도밭들도 1853년 복구되기 전까지 불운을 겪었다.
2세기~13세기에 생테밀리옹 포도밭에서는 (영국에서 ‘왕의 포도주’로 알려진) ‘뱅 오노리피크’(vins honorifiques)를 생산했다. 왕과 주요 인물들에게 공물로 바쳤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으며, 그만큼 질이 좋았음을 알 수 있다. 라 쥐라드(La Jurade)로 알려진 규제 단체가 생테밀리옹 포도주의 질을 검사한 뒤 한정된 포도주에 한해 이 명칭을 수여했다. 18세기에 플랑드르 소비자들의 요구로 인해 포도 재배가 크게 늘어났다. 생테밀리옹 포도주의 질이 좋아지면서 제조되는 즉시 모두 바다를 통해 수출할 수 있게 되었다. 18세기에 생테밀리옹 포도주는 당대의 많은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그 탁월한 질을 인정받게 되었다. 1853년 파리-보르도 간 철도가 개통되면서 생테밀리옹 포도주의 배급은 크게 늘어났다.
보르도의 다른 포도밭과 비교하여 생테밀리옹의 포도주는 혁신성에서 가치가 크다. 1884년 최초의 포도주 기업 조합을 결성하고, 1932년에는 지롱드에 최초의 협동 포도주 지하 저장소를 세웠다. 1867년 생테밀리옹 포도주는 만국박람회에서 금메달을 받았고 1889년에는 만국박람회의 가장 큰 상인 그랑프리상을 공동 수상했다. 프랑스혁명 때 탄압받았던 라 쥐라드는 1948년 재건되었고 계속해서 생테밀리옹 포도주의 질을 감식하고 있다. 보르도의 유명 포도주들이 1855년부터 등급을 지정한 반면 생테밀리옹 포도주는 1954년 처음으로 전국원산지명칭관리원(Institut National des Appellations d’Origine : AOC)에서 등급 판정을 받아 네 개의 등급을 받았다. 1984년 생테밀리옹과 생테밀리옹 그랑 크뤼(Saint-Emilion Grand Cru)의 두 등급으로 줄어들었다. 현재 생테밀리옹 포도 재배 지구는 연평균 230hl(헥토리터)의 적포도주를 생산하며, 이것은 지롱드 AOC 포도주의 10%에 해당하는 양이다.
글. 함혜리 문화전문 저널리스트
함혜리
문화전문 저널리스트, 문화예술 전문 온라인 매체 <컬처램프> 발행인. 대학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하고 프랑스 파리 제2대학에서 언론학 박사과정(D.E.A.)을 마쳤다. 30년 일간지 기자 경력을 살려 문화와 예술의 저변을 확대하는 작업에 집중하고 있다. 저서로는 세 차례에 걸친 프랑스 체류경험을 바탕으로 쓴 프랑스 사회비평서 『프랑스는 FRANCE가 아니다』(2009), 대한민국 대표 예술가들의 인터뷰를 담은 『아틀리에, 풍경』(2014), 유럽 유수의 미술관 건축을 소개하는 『미술관의 탄생』(2015)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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