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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주 병원 마케터가 바라본 짧고 얕은 문화이야기] 시대를 앞선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을 아시나요?volume.34 2023. 5. 2. 15:38
나혜석의 <자화상>을 처음 전시회에서 접했던 것이 6-7년 전인 듯하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신여성을 주제로 묶어서 했던 전시였는데 거기서 자화상이라 표기된 이국적인 한 여성을 작품으로 만났다. 꾹 담은 입술과 무표정한 표현 속에서 짙은 화장을 한 그녀의 눈빛은 슬퍼 보였다. 그렇지만 묵묵히 이 슬픔을 감내하고 버터 내겠다는 감정도 보였다.
나혜석 작가에 대해 익히 들어왔지만 전시를 보고 와서 그녀에 대해 검색해 보고 그녀의 스토리를 찾아보고 그 이후 다른 전시에서 회화가 아닌 그의 문체를 확인하기도 하면서 나혜석에 매료되었다. 나혜석의 삶은 그녀가 개척해 가는 삶이었다. 남성들 주축의 영역에 스스로 그 길을 만들어서 걸어나간 그녀의 삶은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나혜석을 전시회에서 만났던 것 중 또 한번 대단한 여성이라고 나에게 각인된 게 ‘모(母)된 감상기’의 글이었다. 1923년 ‘동명’이란 잡지에 실린 글인데, 나혜석은 “모성애는 본능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모성은 저절로 생겨나는 감정이 아니라 사회의 강요로 인해 만들어진 결과라는 것이다. 자식과의 교감에 따른 행복도 물론 인정했지만 출산으로 인해 여성 자신의 삶을 ‘모성애’라는 단어로 인해 모두 미뤄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던 것이다. 지금도 당당히 말하기 어려울 법한데 그걸 그녀는 표현해 냈다. 반박의 글이 다시 실렸고, 또다시 반박 글을 올리면서 사회에서 공격받는 여성이 되었다. 모두가 생각만 하고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에 반기를 든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을까?
그런 그녀에 대해 다시 상기하게 된 게 바로 얼마 전 수원시립미술관의 미술관 소장품 상설전 ‘물은 별을 담는다’에서이다. 그녀의 고향인 수원에서는 나혜석 거리가 있을 정도로 특별히 그녀를 아낀다. 거기서 다시 만난 <자화상>은 여전히 처연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또 다른 작품인 <염노장> 속 비구니의 모습도 그리 편한 모습이 아니었다. 세상풍파를 모두 겪은 듯한 힘들고 슬픈 모습을 한 비구니가 봇짐을 메고 서 있었다. <나부> 작품에서는 여성의 외향적 아름다움보다는 화가의 시선에서 여성 그 자체의 당당함을 붓 터치로 표현해냈다.
끊임없이 자신의 목소릴 내었던 나혜석
나혜석은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일본에 유학을 가 있던 오빠의 권유로 일본 유학 길에 올라 도쿄에 있는 사립여자미술학교에서 유화를 배웠다. 아버지께서 결혼을 권하자, 여자유학생 학우회 기관지 <여자계> 발행에 참여하면서, 1918년에 단편소설 ‘경희’를 써서 조혼, 가부장제 등 여성에게 불리한 관습에 대해 비판했다. 일본에서 오빠 친구였던 시인 최승구와 사랑에 빠졌지만 이른 나이에 그는 결핵으로 죽었다.
그때 교토에서 법을 공부했던 김우영이 열열하게 구애했고, 한국에 돌아와 독립운동을 하고 5개월간 옥살이를 하고 나온 후 그녀는 세상과 어느 정도 타협하고, 김우영과 결혼을 하고 만주 안동(지금의 단동)에서 살았다.
결혼 후 1921년에 첫 개인전을 열었을 때 5000명의 관람객이 몰리는 등 대성공을 거두고 조선미술대전에도 입선하였지만,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엄마가 아닌 여성으로 살아가는 일이 힘든 일임을 점차 깨닫게 되기도 했다. 이때 발표한 것이 바로 위에서 언급한 ‘모(母)된 감상기’이다.
남편인 김우영이 유럽에 나가게 되자 남편을 따라 시베리안 횡단열차를 타고 유럽여행을 하게 되었고, 몇 개 나라를 여행한 후 남편은 법을 공부하기 위해 베를린으로 가고 나혜석은 그림 공부를 위해 파리로 떠났다. 이때 그렸던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 바로 위에서 언급한 <자화상>이다.
남편은 파리에 있었던 그의 친구인 최린에게 아내를 잘 보살펴달라고 부탁했고, 이 시기에 나혜석과 최린 사이에는 사랑과 같은 감정이 생겨났다. 1929년 귀국 후 남편은 이를 눈치챈 후 나혜석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이때 남편도 외도를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두 사람은 결국 1930년에 둘은 이혼을 했다.
결국 이혼 후 세상의 시선은 나혜석에게 쉬운 길이 아니었다. 분명 자신이 죄인이면 상대 남성들도 함께 죄인이어야 하는데 세상은 나혜석에게만 불륜녀의 딱지를 붙여 모질게 대했던 것이다. 그때의 감정을 담아 쓴 글이 1933년 ‘이혼 고백장’이다.
“조선의 남성이란 인간들은 참으로 이상하오. 잘나건 못나건 간에 그네들은 적실, 후실에 몇 집 살림을 하면서도 여성에게는 정조를 요구하고 있구려. 하지만 여자도 사람이외다! 한 순간 분출하는 감정에 흩뜨려지기도 하고 실수도 하는 그런 사람들이외다.” 여성도 남성처럼 실수할 수 있다고 외쳤지만, 지금 시대도 도덕적 잣대부터 먼저 들이대는데 이 시대에서 그녀에게 주홍글씨가 얼마나 선명하게 새겨 놓았을지 상상조차 가지 않는다.
이혼 이후에 그녀는 저잣거리에서 돌팔매질을 당했고, 자녀들은 볼 수 없었고, 화랑으로부터 외면당해 생활고까지 겹쳐졌다고 한다. 조선총독부조차 그녀를 감시하고 여성해방운동을 불온하다 여기며 그녀에 대한 지원을 끊도록 했다. 1940년대에 들어서서 그녀는 파킨슨병과 중풍에 시달렸고, 우울증과 대인기피증도 생기며 결국 1948년에 세상을 떠났다. 누군가는 행려병자로 죽었다고 하고, 누군가는 무연고자가 모인 병동에서 생을 마감했다고도 한다.
상실의 시대에서 미움만 받았던 안타까운 선구자
우리나라 여성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작가이며, 독립운동가이자 여성인권운동가였던 그녀의 끝은 그렇게 쓸쓸했다. 생전에 나혜석이 그림을 보관하던 창고에 큰 불이 나서 그녀의 작품들 대다수를 잃었다고 한다. 그래서 현재 국내에 남아 있는 그녀의 작품은 40여 점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 숫자조차도 정확하지 않다고. 그래서 그녀의 작품들을 만나는 것은 특별하고 특별한 듯하다.
지금 이 시대에 태어났다면 그녀의 삶을 달라졌을까? 그녀가 말하고자 한 것은 여자를 넘어선 인간으로 당당히 서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자 한 것이니 시대를 잘 만났다면 예술가이자 지식인이자 실천가로 더욱 빛을 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이 드는 것이 비단 나뿐만은 아닐 듯하다.
미움받을 수밖에 없는 시기에 태어나 피지도 못하고 미움만 받다가 사그라들었지만 그녀가 남긴 작품들 앞에서 다시 한번 그녀의 존재 의미를 기억해 본다.
글. 이현주 병원 마케터
이현주
글쓴이 이현주는 바른세상병원에서 홍보마케팅 총괄을 하고 있는 병원 마케터이다.병원 홍보에 진심이긴 하지만, 한 때 서점 주인이 꿈이기도 했던 글쓴이는 독서와 예술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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