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태호 원장의 책 해방일지] 거의 모든 것의 역사volume.32 2023. 2. 27. 21:10
나의 책 해방일지. 8th.
내 책꽂이에서 오랜 기간 영어(囹圄)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좋았던 책을 다시 꺼내는 시간.
내 책장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오랜 기간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책의 가치는 얼마일까? 책 한 권의 가격이 15,000원 정도지만, 저 책이 차지하고 있는 공간의 가격을 포함해서 환산해 보면 가치는 더 비싸질 것이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책의 가치를 나는 잘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이 책을 저 공간에 몇 달, 혹은 몇 년을 두는 것은 합리적인가? 자기 방이나 일하는 공간에 오랜 기간 자리를 차지하고 움직이지 않는 물건이 어느 정도 가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물건의 가격과 차지하고 있는 공간의 지가를 합한 가격이, 물건이 가지고 있는 가치일 것 같은데, 오랜 기간 사용하지 않으면서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물건은, 언젠가 그 가치를 실현할 날이 올 수 있을까?
거의 모든 것의 역사 (A Short History of Nearly Everything)
빌 브라이슨 저 | 이덕환 역 | 까치(까치글방) | 2003
저자인 빌 브라이슨은 기자이자 작가, 대학교 총장으로 내가 읽은 책의 저자 중에서 최고위직인 것 같다.
'거의 모든 것의 역사'를 읽고 나서, 저자의 다른 책도 궁금해서 읽어 봤다. 주로 여행기를 많이 썼는데, '발칙한 유럽 산책 (Neither Here Nor There)'을 읽어 보았다. '거의 모든 것의 역사'와는 다른 종류의 책이었는데, 유쾌하고 재미있었다. 작가로서의 빌 브라이슨이 쓴 책은 대부분이 여행기인데, 한 권만 읽어 봤지만 나머지도 분명히 재미있을 것 같다. 최근에는 '바디'라는 우리 몸에 대한 이야기를 쓴 책이 나왔다. 빌 브라이슨이 쓴 책 중에서 '나를 부르는 숲 (A Walk in the Woods)'은 영화로도 만들어졌고, 영국의 더럼 대학교 총장도 했다. 더럼 대학교가 어떤 대학교인지 위키피디아에서 검색해 봤더니 영국 내에서 오래된 명문 대학교라서 살짝 놀랐다. '거의 모든 것의 역사'는 지적인 향연이고, '발칙한 유럽 산책'은 약간은 언어적인 유희 쪽이 강한 책이라서, 이미지의 중심을 잡기가 쉽지 않았는데, 더럼 대학교라는 명문대의 총장도 했다고 들으니, 연상되는 그림은 미국 코미디언인 코난 오브라이언이 다트머스 대학교 졸업식 축사 장면이 연상되었고, 이 분의 총장 연설이 있다면, 코난 오브라이언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고 미루어 짐작을 해 본다. (100% 뇌피셜이다.) '발칙한 유럽 산책(Neither Here Nor There)'의 번역 제목을 '발칙한'이라는 글을 넣은 이유가 궁금한데, 책 내용이 약간 발칙한 면이 있기는 하다. 이분의 한국어 번역 책에는 '발칙한'이라는 이름이 많이 붙어 다닌다.
'지대넓얕'이라는 책이 있다. 지적인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이라는 뜻이다. 여러 권이 시리즈로 나오고 있는데, 한 권만 읽어 봤다. 빡빡한 텍스트가 쉴 틈 없이 밀려와서 읽기가 쉽지는 않았다. '거의 모든 것의 역사'는 '지대넓얕'의 서양 버전쯤 될 것 같다. 차이가 있다면, '거의 모든 것의 역사'는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에 배운,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에 약간의 인류학이 들어간 내용이고, '지대넓얕'은, 지구와 우주의 이야기가 좀 나오기는 하지만, 인문학과 철학, 예술, 종교적인 내용 위주였던 것 같다. 비슷한 프레임을 가지지만, 내용은 다른, 둘 다 좋은 책이라고 생각된다. '지대넓얕'보다는 '거의 모든 것의 역사'가 출판 연도가 빠르다.
이 책의 곳곳에 나름 유머를 배치해 두기는 하였지만, 500여 페이지에 이르는 그림도 없고, 사진도 없어서, 약간의 워밍 업 기간을 지나고, 러너스 하이를 느끼지 못하면, 끝까지 완독을 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독서에도 약간의 연습이 필요하다고 생각이 드는데, 이 책은 독서의 연습이 어느 정도 되었다고 생각이 되면 도전해 볼 만한 책이라고 생각된다.
책 표지에 이런 글이 있다.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 이래 세계적 화제가 된 과학교양서"
'호킹 지수'라는 말이 있다. 미국의 한 수학자가 진도가 잘 나가지 않는 책을, 킨들의 완독률과 통계를 이용해서 만든 것인데,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는 1000만 권 이상 팔렸지만, 완독률은 6.6%라고 한다. 많이 팔렸지만, 쉽게 읽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출판사 생각에는 '거의 모든 것의 역사'도 호킹 지수가 '시간의 역사'와 비슷할 것 같다고 생각을 한 건가? 내가 너무 행간의 의미를 읽은 건가?
책에 없는 에피소드 하나. 어떤 사람이 일생일대의 노력으로 '우리나라에 있는 풀'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냈다. 그런데 전혀 팔리지 않았다. 출판사의 편집자가 책의 제목을 조금 바꾸고 나서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편집자는 제목을 이렇게 바꾸었다. '입시에 나오는 우리나라에 있는 풀'
그럴듯한 이야기지만 사실은 아니고, 내가 지어낸 말이다.
이 책의 띠지에는 책을 팔고 싶어 하는 출판사의 마음을 담아 이렇게 적었다.
"대학입시의 논술이나 면접의 질문거리를 찾는 교수님들이 제일 먼저 구해 읽을 책 / 최재천 교수"
최재천 교수님과 친분이 없지만, 언젠가 뵐 날이 있으면 진짜 이런 말을 하셨는지 물어보고 싶다.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충분히 좋은 책인데. 출판사는 정말 최선을 다했다.
책은 우주의 출발부터 이야기하고 있다. 태양계 이야기. 그리고 지구의 크기와 지구를 연구하는 이야기. 아인슈타인과 원자, 분자, 각각의 화학적 물질, 생명과 세포, 진화론과 다윈. 그리고 다양한 학자들의 이야기. 인류의 이야기까지.
읽다가 보면 500여 페이지가 순식간에 지나간다고, 거짓말을 하기는 싫다. 재미있는 책이지만, 두께감이 좀 있어서 시간은 좀 걸린다. 중고등학교에서 수업을 착실하게 들은 사람은 아주 재미있을 것 같고, 중고등학교 수업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는 사람들은, 이 책을 읽고 나서 만일 다시 중고등학교 과학 교과를 볼 일이 있다면, 그 과목의 내용이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하다. 왜 학생 때 배운 교과서들은 하나같이 재미없게 책을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많은 과학사적으로 중요한 이야기들이 재미있게 적혀 있다. 그런 것을 일일이 적다가 보면 끝이 없을 것 같고, 기억나는 몇 개를 적어 보면,
1980년대 텍사스 주에서 입자 가속기를 만들기로 하였다. 우주가 탄생하는 순간의 10조 분의 1초를 만들기 위해서 100억 달러의 건설비와 매년 수억 달러의 유지비가 들어간다. 이 공사는 1993년에 미 의회가 20억 달러까지 집행하고 나서 중단시킨다. 물리학자들의 호기심과 우주 탄생의 순간의 비밀을 연구하기 위해서 이 비용을 들이는 것을 모든 사람이 동의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런 연구도 누군가는 해야 하겠지만 이런 돈을 낼 사람이 쉽게 나타날 것 같지는 않다. 나 같은 속물이 저 많은 돈을 집행하는 자리에 있으면 이렇게 물어봤을 것 같다. "저렇게 많은 돈을 들여서 우주 탄생의 비밀을 알 수 있으면 뭐가 달라지는 건지? 그리고 저런 기구를 만들면 우주 탄생의 비밀을 알 수는 있을까?" (순수한 책을 읽으면서도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나의 저렴한 속물근성의 경이로움.)
이 책에 나온 많은 이야기 중에서 생물, 화학 등의 이야기는 비교적 쉽게 이해가 되는데, 물리학적 이야기는 조금 어려운 이야기도 있었다. 아마 작가분도 공부하고 책을 쓰면서 머리에서 땀 좀 났을 것 같다. 과학사적으로 중요한 발견이라도 그때는 그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몰랐던 경우도 꽤 많지 않았을까?
과학적 발견에는 3단계가 있다.
1. 사람들이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고 부정한다.
2. 그 후에는 그 중요성을 부정한다.
3. 마지막으로는 엉뚱한 사람에게 그 업적을 인정한다.
-알렉산더 폰 훔볼트-
이런 이야기에 생각나는 사람이 맥스웰. 맥스웰의 전자기장에 대한 법칙 발견은 1800년대 알려졌지만, 그 사람은 자기의 이론을 바탕으로 라디오가 만들어지고, 휴대폰이 만들어지는 이론적인 토대를 제공했다는 것은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스위스 특허청에서 일하던 아인슈타인의 논문 중 하나는 광전자에 대한 논문인데, 그 이론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 텔레비전이다. 아인슈타인이 논문을 쓸 때, 그는 자신의 이론으로 텔레비전이 만들어질 것이라고는 생각 못 했을 것이다.
세상이 망하고, 어른은 자기밖에 남지 않았을 때, 다음 세대에 꼭 전해 주고 싶은 과학적인 지식 하나가 있다면, 리처드 파인만은 "세상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라는 말을 전해주겠다고 하는데, 만일 내가 그 자리에 있었으면 그 이야기가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인지 알 수 있을까? 지금도 모르는데. 그리고 보면 맥스웰의 이론으로 라디오와 휴대폰을 만든 사람과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가지고 텔레비전을 만든 사람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다. 기초과학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여러 가지 다양한 이유로 쉽지 않다.
지구에 대해서 언급된 내용 중에서 재미있는 것은, 미국의 옐로 스톤 국립공원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1960년대에 어떤 연구원은, 옐로 스톤 국립공원이 화산 지역인데, 분화구를 발견하지 못한 것에 호기심을 가지고 분화구를 찾았다. 그런데 전혀 분화구를 찾을 수가 없었다. 마침 NASA에서 고공 카메라를 실험하다가, 옐로 스톤 국립공원을 찍었는데, 그 사진을 보고 분화구를 찾을 수 없는 이유를 알았다. 분화구의 지름이 64킬로미터가 넘어서 땅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서울에서 수원까지의 거리가 30킬로미터니까 어느 정도 크기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화산 폭발이 있던 때에는 사방 1000 킬로미터에서 살아 있는 것이 없었을 것이다. 옐로 스톤은 대략 60만 년에 한 번씩 폭발을 하는데, 마지막 폭발은 63만 년 전이었다. 문제는 화산 폭발은 예측할 수 없다. 옐로 스톤 국립공원에 한번 가보고 싶어졌다.
생명과 인류학에 대한 재미있는 글도 있었는데,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양쪽 부모님이 필요하다. 그리고 부모님이 존재하려면 또 양쪽의 부모님이 필요하다. 8대 조상까지 올라가면, 250명이 필요하다. 8대 조상이 살던 시대는 다윈과 링컨 대통령이 있던 시대이다. 만일 청교도 시대로 올라가면 16,384명이 필요하다. 20대 조상까지 올라가면 1,048,576명이 필요하고, 30대 조상까지 올라가면 10억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로마인들이 살던 60대까지 올라가면 10의 18승 명이 필요한데, 이 숫자는 지구상에 살던 모든 사람의 수를 합친 것보다 많다. 유전적으로 모든 인류는 가족이다.
이런 재미있는 내용을 적으려면 끝이 없을 것 같고, 과학의 모든 역사와 언급된 내용들이 유기적으로 재미있게 얽혀 있는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다가 보면은, 실용적이고 즉각적인 학문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순수한 학문에 대한 경외심도 생기고, 이런 학문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한국에서는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바로 밀려온다. 책에 적힌 대부분의 이야기는 유럽 과학자들이 밝혀낸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프로 야구에서 3할 타자는 아주 훌륭하다. 연봉이 엄청나다. 10번의 기회에 3번의 성공이 그렇게 어렵다는 말이다. 반대로 생각하면 프로 선수라도 10번 나오면 7번은 실패한다. 우리나라 과학자의 연구비와 생산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는 연구비를 주면 반드시 성과물이 나와야 한다. 10번 중에 3개만 성과가 나오고 7개가 아웃이면, 칭찬을 들을까 욕을 먹을까? 연구 성과도 빨리 나와야 할 것 같다. 연구라는 것이 1년짜리 연구도 있고, 10년짜리 연구도 있고, 100 년짜리 연구도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돈을 주면 반드시 성과가 나와야 하고, 그것도 가급적 돈을 준 사람의 임기 중에 성과가 나오게 닦달을 할 것 같다. 우리나라의 토양에서, 성공 확률이 애매한 긴 시간이 필요한 연구를 하기는 쉽지 않을 거다. 앞으로는 내 생각이 잘못된 것이라고 대부분이 반론을 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그렇다고 원천 기술이 없고 앞으로도 원천 기술을 가지기 쉽지 않을 것 같아서 암울한 미래만이 기대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애플이 뭐 자기들이 개발한 기술이 있어서 돈을 많이 버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요즘 아쉬운 것은 인구가 줄어드는 것이랑 똑똑한 많은 사람들이 과학보다는 의학 쪽으로 몰리는 것이 찜찜한데, 일단 모수가 줄어드는 게 아쉽고, 지금의 삼성 전자나 현대차가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지게 된 것은, 지금의 40-50대가 대학에 갈 때는 물리학과나 전자공학과에 뛰어난 인재가 많이 간 덕분이라고 생각되는데, 요즘 뛰어난 인재들이 의학과로 가서, 그들이 40-50대가 되었을 때, 의학을 했던 사람들이 삼성전자나 현대차같이 뛰어난 기업을 만들어서 세계에서 경쟁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
빌 브라이슨은 기자였는데, 박식한 과학 지식을 어떻게 가지게 되었을까 궁금하다. 어느 정도의 시간과 노력으로 이런 자료를 모으고 체계적인 정리를 하였을까. 대학 총장도 했는데, 훌륭한 총장이지 않았을까 미루어 짐작해 본다. 많이 안다고 훌륭한 총장이 되지는 않았겠지만, 좁은 지식을 가진 사람보다는 그래도 넓은 지식을 가진 사람이 잘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책을 보면 정말 좋은 재능인 유머가 많아 보인다.
세상에 똑똑한 사람도 많고, 박식한 사람도 많다. 넓으면 깊지 못하고, 깊으면 넓지 못하다는 말도 있고, 때에 따라서 generalist를 원하기도 하고, specialist를 원하기도 하는 등, 변덕이 심하다. 박식에도 두 가지가 있다. 넓을 박을 쓰는 박식(博識)이 있고, 엷을 박을 쓰는 박식(簿識)이 있다. 대체로 넓기도 힘들지만, 넓지도 못하면서 얇기만 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전에 박사라고 불리는 사람은 과학, 역사, 수학 등등 모든 분야를 다 아는 사람이었다(generalist). 그런데 지금의 박사는 너무 미시적인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 있다(specialist). 세상은 specialist, generalist, multiplayer 등등의 다양한 사람을 필요로 해서, 어디에 기준을 맞추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땅을 파 본 사람은 알 것이다.
깊게 파기 위해서는 일단 넓게 시작해야 한다.
이 책은 일단 넓게 시작하기 좋은 책이다.
글. 마태호 삼성제일소아청소년과 원장
'volume.3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섬김의 가치로 환자의 필요를 만족시켜 주는 민병원 (상) (0) 2023.03.02 실질적인 부분에 투자한 안전하고 튼튼한 민병원 (하) (0) 2023.03.02 [이현주 병원 마케터가 바라본 짧고 얕은 문화이야기] 빈센트 발 展 (0) 2023.03.02 [최경숙 간호부장의 노인병원 애상] 경험이 실력이다! (0) 2023.03.02 [임진우 건축가의 '함께 떠나고 싶은 그곳'] 낙산이화마을 (0) 2023.02.27 [인천가톨릭대학교 바이오헬스디자인전공] 무장애와 유니버설 디자인, 그 차이는? (0) 2023.02.27 [이수경 원장의 행복을 주는 건강 코칭] 챗GPT가 가르쳐준 100세 건강법 (0) 2023.02.27 [박효진 교수의 '맛있는 집'] 지중해식 요리 (0) 2023.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