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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 FOCUS] 제49차 IHF(국제병원연맹) World Hospital Congress(세계병원대회) 개최ARTICLE 2026. 11. 3. 18:14
제49차 IHF(국제병원연맹) World Hospital Congress(세계병원대회) 개최

제49차 IHF(국제병원연맹) World Hospital Congress(세계병원대회)가 지난 10월 19일부터 22일까지 서울 코엑스 마곡컨벤션센터에서 ‘Global Learning, Local Action for Every Patient(글로벌 경험을 지역의 실천으로, 모든 환자를 위해)’를 대주제로 개최됐다. 2007년 서울에서 열린 제35차 대회 이후 19년 만에 다시 한국에서 열린 세계병원대회로, 국제병원연맹과 대한병원협회가 공동 주최했다.
이번 서울 대회에는 세계 90여 개국에서 병원 및 보건의료계 주요 인사와 관련 산업계 관계자 2,000여 명이 참석했다. 각국의 병원장과 최고경영자, 의료 전문가, 정책 결정자, 보건의료기관 및 관련 기업 관계자 등이 한자리에 모여 세계 병원계의 주요 현안과 미래 발전 방향을 논의했다.
대주제 ‘Global Learning, Local Action for Every Patient’에는 국가와 의료 환경은 서로 다르지만 세계 병원계가 지식과 경험을 함께 나누고, 이를 각국의 현장에 적용해 궁극적으로 모든 환자에게 더 나은 의료를 제공하자는 뜻이 담겼다. 60여 개 세션에서는 병원 리더십과 경영, 디지털 헬스케어와 AI, 환자안전, 의료혁신, 지속가능한 병원, 글로벌 헬스케어 협력 등 세계 병원계가 주목하는 주제들이 폭넓게 다뤄졌다.
특히 이번 대회는 최대 규모, 최다 참가자, 최다 연제 및 포스터, 역대 최대 전시장과 참가 부스 등 모든 기록을 갱신하며 큰 성과를 거뒀다. WHO와 한국 정부가 공동 주최하는 World Bio Summit과 동시에 진행되며 시너지를 극대화했고, 두 행사가 함께 ‘AI 헬스케어 서울선언’을 이끌어내며 향후 글로벌 AI 헬스케어 발전의 중요한 발판을 마련했다.
국제병원연맹(IHF)은 전 세계 병원 및 보건의료계를 대표하는 국제기구다. 1929년 설립돼 현재 세계 80여 개국의 병원협회와 보건의료기관 200여 곳이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3만5,000여 개 병원이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IHF가 매년 세계 각국을 순회하며 개최하는 세계병원대회는 병원 및 보건의료 분야의 최신 동향과 미래 전략을 논의하는 대표적인 국제행사로, 세계 각국의 병원장과 보건의료기관 최고경영자, 정책 결정자, 의료 전문가, 관련 산업계 주요 인사들이 참석한다.
한국과 IHF의 인연도 한층 깊어졌다. 대한병원협회를 대표해 국제 활동을 활발히 이어온 이왕준 대한병원협회 부회장(명지병원 이사장)은 IHF 운영위원으로 활동해 왔으며, 2025년 IHF 총회에서 차기 회장으로 선출됐다. 현재 헨리 갈라르도(Henry Gallardo, 콜롬비아) 회장과 함께 IHF 회장단(Executive Committee)으로 의사결정에 참여하고 있으며, 2027년부터 2029년까지 IHF 회장을 맡는다.
매거진HD는 이번 대회에서 열린 세션 가운데 가장 의미 있는 교훈과 과제를 남긴 두 세션을 심도 있게 소개한다. 첫 번째는 보편적 건강보장을 빠르게 이룬 한국 의료가 초고령 사회와 의료재정의 지속가능성이라는 과제를 어떻게 풀어갈지 짚은 코리아 세션이다. 두 번째는 사우디아라비아, 싱가포르, 스페인 카탈루냐, 폴란드의 의료 리더들이 대규모 환자 중심 변혁의 경험을 나눈 ‘대규모 의료시스템 혁신: 비전에서 실제 성과로’ 세션이다.
취재. 박하나 편집장
<대한민국 의료의 여정: 발전, 도전과제, 그리고 미래 혁신>
이번 <대한민국 의료의 여정: 발전, 도전과제, 그리고 미래 혁신>의 세션은 대한민국 의료시스템이 걸어온 발전 과정을 짚고, 보편적 건강보험과 첨단 기술, 고품질 진료로 세계적 명성을 쌓아온 배경을 심층적으로 들여다봤다. 지난 수십 년간의 성과를 조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고령화, 의료인력 부담, 재정적 지속가능성이라는 당면 과제를 함께 다뤘다. 회복탄력적이고 환자 중심적이며 미래에 대비한 보건의료 체계를 고민하는 각국의 보건의료 리더와 정책결정자들에게 한국의 경험을 교훈으로 건넨 자리였다. 이번 세션에서는 좌장인 한휘종 연세대학교 보건대학원 교수의 소개로, 세 명의 연자가 한국 의료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차례로 짚었다. 남효진 교수는 국민건강보험이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정책적 토대를 되짚었다. 공인식 보건복지부 건강보험지불혁신과장은 지역·필수의료 중심의 지불제도 개혁 방향을 제시했고, 박정율 세계의사회(WMA) 회장(고려대 안암병원 신경외과 교수)은 초고령 사회에 대응하는 병원 부문의 혁신 전략을 소개했다.
좌장. 한휘종 연세대학교 보건대학원 교수

이날 세션에서 다룬 주제는 크게 세 갈래다. 보편적 건강보장을 빠르게 확대해 온 과정, 초고령 사회가 던지는 도전 과제, 그리고 병원 진료와 의료 재정에서 이어지고 있는 변화다. 짧은 기간에 전 국민 건강보험을 이루고, 이제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늙어가는 사회를 마주한 한국의 사정을 고스란히 담은 구성이다.
한휘종 좌장은 한국의 경험이 지닌 의미를 두 측면에서 짚었다. 특히 그는 “한국의 경험은 국제 의료계에 귀중한 교훈을 제시한다”면서도 “동시에 의료 접근성 확대가 단지 시작일 뿐이라는 점을 일깨워 준다”라고 말했다. 이어 “의료 서비스의 질, 지속 가능성, 그리고 공평한 접근성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혁신과 개혁이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
1. 한국 건강보험, ‘속도의 역설’을 마주하다 / 정부 주도 확대와 민간 병원 동원이 남긴 성취와 과제
첫 번째 연자. 을지대학교 의료경영학과 남효진 교수

이번 세션의 첫 연사로 나선 남효진 교수는 한국 국민건강보험(NHI)의 초기 모습과 급격한 성장을 이끈 요인을 되짚었다. 핵심은 두 가지였다. 정부 주도의 단계적 확대, 그리고 의료 공급을 늘리기 위한 민간 병원의 전략적 동원이다. 그는 이 두 선택이 한국을 보편적 의료보장의 모범 사례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오늘날 구조적 문제의 뿌리가 됐다고 진단했다.
남 교수는 “한국의 보편적 의료보장(Universal Health Coverage)을 향한 여정은 독특할 만큼 빠르게 가속화됐다”라고 설명했다. 한국은 1977년 500인 이상 대규모 사업장 근로자를 대상으로 강제 건강보험을 도입했다. 당시 적용 대상은 전체 인구의 9% 안팎이었다. 이후 적용 범위를 빠르게 넓혀 1989년 전 국민 건강보험 시대를 열었다. 그는 “서유럽 국가 중 일부는 같은 이정표를 달성하는 데 반세기가 걸리기도 했다”라며 한국의 속도가 얼마나 이례적이었는지 강조했다.
이 ‘초가속 확장’의 첫 번째 동력은 정부 주도의 순차적 확대 정책이었다. 정부는 건강보험 가입을 의무화하고, 중앙에서 엄격하게 관리하는 행위별 수가제를 도입했다. 이 수가 체계는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으며, 의료비를 관리 가능한 수준에 묶어 두고 물가 상승을 막는 데도 기여했다는 것이 남 교수의 설명이다.
두 번째 동력은 민간 자본의 동원이었다. 급격한 산업화 시기, 정부 예산으로는 전국에 공공병원을 세울 여력이 없었다. 정부는 대신 민간 자본이 의료시설을 짓도록 장려했고, 그 결과 공공 재정을 투입하지 않고도 병상 수와 의료기술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남 교수는 “오늘날 한국 전체 병상의 90% 이상이 민간 소유로 운영되고 있으며, 이는 매우 접근성 높은 의료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빠른 성장에는 대가가 따랐다. 남 교수는 이를 ‘속도의 역설(paradox of speed)’이라고 규정했다. 엄격한 수가 규제와 민간 중심의 의료 제공 체계가 맞물리면서 세 가지 문제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의료 공급의 지역 격차, 상급종합병원에 대한 과도한 의존, 그리고 진료량 중심의 의료 문화다. 낮은 수가 아래서 민간 병원이 수익을 내려면 진료량을 늘릴 수밖에 없었고, 병원과 인력은 수요가 많은 대도시로 몰렸다.
남 교수는 “한국의 초기 건강보험 여정은 속도와 보장성 측면에서 괄목할 만한 성공을 거뒀다”면서도 “이러한 역사적 선택들이 현재 구조적 문제의 발판을 마련했다”라고 설명했다.
2. 건강보험 지불 신호를 다시 쓰다 / 보장성 확대 넘어 지역·필수의료 중심 체계로
두 번째 연자. 공인식 보건복지부 건강보험지불혁신과 과장

두 번째 연사로 나선 공인식 보건복지부 건강보험지불혁신과(Division of Health Insurance Payment Innovation) 과장은 보편적 의료보장을 이룬 한국이 더 지속 가능한 의료체계로 나아가기 위한 과제를 짚었다. 그는 “의료 개혁을 가속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에 올바른 방향성과 적절한 인센티브, 그리고 상호 신뢰가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
공 과장은 서울을 찾은 참석자들에게 환영 인사를 건네며 ‘빨리빨리’라는 말로 발표를 시작했다. 빠르게 움직이는 한국의 특성은 음식 배달과 디지털 서비스는 물론 병원 예약과 일차의료 현장에서도 잘 작동한다. 예약 없이 찾아가도 진료받을 수 있을 정도다. 다만 속도만으로 의료 개혁을 완성할 수는 없다는 것이 그의 문제의식이다. 발표는 세 가지 질문을 따라 진행됐다. ‘지역·필수의료 체계를 어떻게 재편할 것인가, 국민건강보험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미래를 위해 어떤 의료체계를 만들 것인가’다.
해법은 지역과 사람을 중심에 둔 의료체계 재편이다. 중앙정부는 목표와 표준, 그에 맞는 재정을 마련하고, 실제 서비스는 지역 주민의 필요에 맞춰 설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은 통합 사회·보건의료 서비스와 지역 필수의료를 포함한 이번 개혁을 위해 법적·재정적 기반을 강화하고 있다. 특히 응급, 모성·소아, 중환자 진료처럼 시장 공급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분야에서는 공공 투자가 필요하다고 봤다. 그가 제시한 방향은 세 가지다. 지역화된 의료, 필수의료의 지역 내 보장, 공공 책임 강화다.
공 과장은 여기에 “치명적인 문제”가 남아 있다고 짚었다. 상급종합병원부터 병원, 의원까지 전달체계를 다시 설계하더라도 의료 제공자는 결국 보상 방식에 반응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던진 질문이 “우리는 적절한 지불 신호를 보내고 있는가”다. 정부는 올해 6월 지불 신호의 원칙을 선언했다. 한마디로 중요한 가치에는 더 많이 보상하고, 가치가 낮은 진료량에는 보상을 줄이는 것이다.
한국은 국민건강보험 지불제도를 지역·필수의료 중심으로 재조정하고 있으며, 그 규모는 약 26억 달러에 이른다. 진료량 중심에서 필수의료 중심으로, 검사·영상 위주에서 전문 인력의 임상 진료 중심으로, 분절된 진료에서 연속적이고 성과 지향적인 진료로 옮겨 가는 것이 방향이다. 일부 과다 보상된 검사·영상 수가는 조정하고, 비용과 임상적 가치에 더 가까운 상대가치체계로 지역·필수의료를 강화한다.
그렇다고 행위별수가제를 없애려는 것은 아니다. 공 과장은 행위별수가제가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며 이를 토대로 발전시키겠다고 밝혔다. 첫째는 더 적절하고 공정한 가격 체계를 갖춘 개선된 행위별수가제다. 둘째는 공공정책 지불로, 필수의료와 지역 접근성, 대기 역량에 대한 가산 지불(add-on payment)이 여기에 해당한다. 셋째는 네트워크를 위한 대안적 지불모델로, 진료 경로(care pathway)와 책임 공유, 한국형 ACO(책임진료기구) 모델과 성과 기반 지불(pay-for-performance)이 포함된다. 이것이 합쳐져 혼합 지불제도가 된다.
그는 “지불제도 개혁은 기술적인 이야기처럼 들리고, 복잡하며 재원도 필요하다”면서도 “원리는 간단하다. 시스템이 무엇을 보상할 것인가를 바꾸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접근 방식은 시범사업을 거쳐 평가한 뒤 확대하는 것이다.
공 과장은 국민건강보험공단(NHIS)과 건강보험심사평가원(HIRA)을 두 축으로 지불과 평가 체계를 정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의료 제공자는 진료 경로와 질을 개선하고 지역 네트워크를 조율하며, 환자는 중요한 성과 지표를 정의하는 데 참여한다.
최근 의대 정원 확대를 둘러싼 갈등에서 얻은 교훈도 언급했다. 기술적 근거는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큰 개혁에는 이해관계자 간 사회적 대화가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실행 가능성을 높이는 단계적 도입과 함께 신뢰를 차근차근 회복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는 “우리에게는 강력한 제도와 훌륭한 데이터가 있지만, 이해관계자들이 그 과정을 공유하지 않는다면 개혁은 여전히 실패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어 성공을 위한 다섯 가지 조건으로 공유된 목표 설정, 공동 설계, 투명한 모니터링, 지역 통합, 시범사업 평가를 꼽았다. 요약하면 개혁은 혜택과 책임, 근거가 뒷받침되고 다양한 이해관계자 사이에서 공유될 때 성공한다는 것이다.
3. 초고령 사회, 병원 혁신은 선택이 아니다 / 압축 고령화를 지속 가능한 혁신으로 바꿀 골든타임
세 번째 연자. 박정율 고려대학교 안암병원 신경외과 교수(세계의사회(WMA) 회장)

세 번째 연사로 나선 박정율 고려대학교 안암병원 신경외과 교수는 한국이 마주한 초고령 사회의 도전 과제와 병원 부문의 혁신 전략을 짚었다. 그는 “저를 ‘JP’라고 불러 달라. J.P. 모건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라는 농담으로 발표를 열고, 한국 사례를 중심으로 세계의사회(WMA) 회장으로서의 글로벌 관점을 더했다.
박 교수는 먼저 세계적 흐름을 살폈다. 2023년 세계 인구에서 60세 이상이 차지하는 비중은 13%였고, 7년 뒤에는 약 15.4%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세계 인구 85억 명 가운데 14억 명이 60세 이상이 되는 셈이다. 올해 세계 기대수명은 73.8세인 데 비해 한국은 83.7세로 10년 가까이 길다. 그는 “지금까지 이토록 빠른 속도로 고령화가 진행된 나라는 없었다”라고 강조했다. 현재 한국의 65세 이상 인구는 약 1,000만 명으로 전체 5,100만 명의 약 20%에 해당된다. 역사상 처음으로 생산가능인구 비중이 70% 아래로 내려갔고, 적어진 젊은 세대가 늘어난 노인 인구를 부양해야 하는 상황이다.
박 교수는 한국이 직면한 구조적 도전을 네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는 속도다. 고령사회에서 초고령 사회로 넘어가는 데 7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둘째는 부양 기반의 축소다. 예전에는 8~9명이 노인 한 명을 부양했지만, 지금은 2~3명이 맡아야 한다. 셋째는 가구 내 고립이다. 노인의 36%가 혼자 살고 있으며, 서울뿐 아니라 전국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넷째는 지역 간 불균형이다. 어느 나라에나 있는 문제지만 한국은 더 심각하다. 전체 인구의 절반가량인 2,500만 명이 서울과 경기도 등 수도권에 모여 살고, 인구 밀도는 한때 도쿄나 뉴욕을 넘어 세계 최고 수준이 됐다. 저출산도 이어지고 있다.
박 교수는 합계출산율이 작년 0.78명에서 올해 0.82명으로 소폭 올랐다고 소개했다. 의료 현장도 늙어간다. 그는 “제 동료 가운데는 95세까지 진료를 하는 분도 있다”라며 의료진의 고령화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재정 부담은 이미 커졌다. 의료 서비스 지출은 10년 사이 1,000달러에서 4,000달러로 네 배가 됐다. 전체 인구의 20%인 65세 이상이 건강보험 재정의 45%를 쓰고 있으며, 이는 인구 비중의 2.5배에 달한다.
한국 정부는 2028년까지의 AI·의료 R&D 로드맵, 스마트병원 확산 지원, 원격의료 등 정책 프레임워크를 추진해 왔다. 박 교수는 많은 나라와 달리 한국에서는 원격의료가 법적으로 허용되지 않았지만, 팬데믹 기간의 시범사업을 거쳐 올해 12월 24일부터 제도화될 예정이라고 소개했다.
그가 말하는 AI 기반 병원은 AI를 부가 도구로 쓰는 병원이 아니다. AI가 핵심 구성 요소이자 운영 구조 자체의 기반이 되는 병원이다. 환자 기록과 임상 행정 업무를 AI가 자동으로 처리하고, 무엇보다 사후 대응이 아닌 예측·선제·예방 중심의 치료를 구현한다. 환자가 위기를 격기 전에 진단과 치료가 이뤄진다는 뜻이다. 삼성서울병원이나 서울아산병원 같은 대형 상급종합병원뿐 아니라 9개 국립대병원도 힘을 합쳐 AI 기반 스마트병원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다만 수가 체계,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는 보안, 의료·개인 디지털 정보 교환을 위한 상호운용성과 표준화는 여전히 풀어야 할 과제다.
지역사회 기반 통합돌봄도 한 축이다. 병원 경영을 넘어 요양병원과 재활병원까지 아우르는 체계로, 박 교수는 지난 2년간 성공적으로 운영해 왔다고 했다. 수술 후 환자를 받을 10~12곳의 병원을 지정해, 환자를 곧바로 퇴원시키는 대신 회복기 재활병원이나 요양병원으로 전원하는 방식이다. 의료인력의 근무 연령을 늘리는 등 폭넓은 인력 전략도 함께 마련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로드맵에 대해서는 “이미 때가 됐다”라고 말했다. 유엔이 ‘건강한 노화를 위한 10년(UN Decade of Healthy Ageing)’을 선포하며 목표 연도로 제시한 2030년까지 남은 4년이 중요하며, 기후변화와 그에 따른 보건 위기 대응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는 “한국 병원계가 변화할지는 향후 4년, 길게는 10년 안에 결정될 것”이라며, 인구 구조의 압박을 내구성 있고 수출 가능하며 지속 가능한 혁신으로 바꾸지 못하면 변화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대규모 의료시스템 혁신 : 비전에서 실제 성과로>
이번 세션은 서로 다른 의료시스템에서 통합 전략과 국가적 정렬을 통해 대규모 인간 중심 혁신이 어떻게 이뤄지고 있는지 살펴본 자리다. 디지털화에 대한 전국 단위의 투자, 환자와 가족의 목소리를 시스템 전반에 체계적으로 반영하는 노력, 환자 여정을 새롭게 설계한 경험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연자들은 정책과 거버넌스, 현장 실무를 한 방향으로 정렬했을 때 환자경험과 효율성, 성과에서 어떤 측정 가능한 개선이 가능한지 보여줬다. 지속 가능한 의료 혁신을 위한 확장 가능한 모델도 함께 제시했다. 세션은 미국병원경영자협회(ACHE) 차기 의장인 마이클 우그웨케(Michael Ugwueke) 메서디스트 르보너 헬스케어 대표이사 겸 CEO가 좌장을 맡았고, 네 나라의 의료 리더가 연단에 섰다.
좌장. 마이클 우그웨케, 메서디스트 르보너 헬스케어(멤피스) 대표이사 겸 CEO
(Dr Michael Ugwueke President and CEO, Methodist Le Bonheur Healthcare, USA)

우그웨케 CEO가 이끄는 메서디스트 르보너 헬스케어는 미국 테네시주 멤피스에 있는 신앙 기반 의료시스템으로, ‘우리가 접하는 모든 삶을 향상시킨다’는 사명을 내건다. 그는 회원과 펠로 5만3,000명 이상이 소속된 미국의료경영자협회(ACHE) 차기 의장이기도 하다. 테네시병원협회 직전 회장을 지냈고 현재 미국병원협회(AHA) 이사회에서 활동한다. 그는 “하나의 보건시스템 내부에서, 그리고 그 시스템을 만드는 정책 결정의 현장에서 모두 변화를 목격해 왔다”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우그웨케 CEO가 제시한 세션의 출발점은 대규모 환자 중심 변혁이 서로 다른 나라에서 혁신 전략과 국가 의제를 통해 어떻게 실현되고 있느냐다. 디지털화와 혁신에 대한 전국 단위 투자, 환자와 가족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체계, 환자 여정의 재설계가 그 사례로 언급됐다.
1. 부서가 아닌 환자 여정을 다시 설계하다 / 비전 2030이 그린 사우디아라비아 의료 변혁의 현장
첫 번째 연자. 모하메드 알아흐마리(Mohammed Al Ahmari) 박사, 사우디아라비아 내무부 의료서비스총국 산하 보안군병원 프로그램(Security Forces Hospital Program, SFHP)의 감독관

그가 내건 주제는 ‘사람 중심의 의료 서비스 제공 혁신’이다. 환자경험, 의료질, 운영 우수성에서 국가적 모범 사례로 자리 잡은 사우디아라비아의 경험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비전 2030(Vision 2030)에 따라 2018년부터 대대적인 보건의료 체계 혁신을 추진해 왔다. 알아흐마리 박사는 처음부터 그 과정에 참여했고, 동부 보건 클러스터(Eastern Health Cluster)에서 8년간 혁신을 경험했다. 그는 “의료 혁신은 하나의 새로운 종교와 같다”라고 말했다. 환자를 위해 사람과 시스템을 모두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수년 전 의료시스템을 설계할 때와 달리, 이제는 사람을 중심에 두고 환자의 여정을 명확하게 구축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설명이다.
변화의 출발점은 비전 2030에 따라 방향을 정한 보건부문 혁신 프로그램(Health Sector Transformation Program, HSTP)이다. 알아흐마리 박사는 이를 “모든 의료 리더를 위한 청사진”이라고 표현했다. 사람 중심이든, 수혜자 중심이든, 환자 중심이든, 그 실체는 국가 진료 모델(Model of Care)이다. 적절한 시기에 올바른 진료를 제공하되, 의료질과 환자안전, 운영 성과를 함께 챙기는 것이 핵심이다.
HSTP는 의료 접근성과 질, 환자안전에서 큰 개선을 이끌었다. 하지만 2018년 혁신이 시작될 때 환자의 여정은 끊겨 있었다. 일차의료는 별도 네트워크로 운영돼 이차 병원과 연결되지 않았고, 환자가 일차에서 이차로, 다시 일차나 삼차로 이동하는 경로가 분명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알아흐마리 박사는 “삼차 의료기관에 너무 많은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환자가 그 단계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라고 진단했다.
그래서 환자 여정을 중심으로 시스템을 다시 짜는 데 힘을 쏟았다. 사우디아라비아는 2030년 기대수명 80세를 목표로 삼았고 현재 79세에 이르렀다. 인구의 97.5%가 기본 보건 서비스를 받고 있다. 사우디 의료에 새롭게 도입된 인구집단 건강관리(population health management)에도 많이 투자했다. 환자를 저위험·중위험·고위험군으로 세분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진료 모델을 전환했다. 전국에 약 20개 보건 클러스터가 만들어졌고, 보건부는 241개 기관을 잇는 세하 가상병원(SEHA Virtual Hospital)을 구축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주된 의료 제공자는 보건부다. 여기에 내무부·국방부 소속 병원과 킹 파이살 전문병원 등이 따로 있다. 알아흐마리 박사는 각 의료 제공자가 자신이 맡은 인구 집단을 고려해 변혁의 방향을 따로 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내무부는 HSTP를 바탕으로 자체 의료망을 하나의 네트워크로 묶었다. 기존의 허브 앤 스포크(hub and spoke) 구조는 예방이나 의료 접근성 측면에서 환자 여정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했다. 이제는 국가 진료 모델을 도입해 이 구조를 보건 클러스터(health cluster)로 바꾸고 있다. 환자가 일차의료에서 시작해 이차 진료를 거쳐 퇴원까지 이어지는 구조다.
내무부 의료망의 수혜자는 710만 명에 이른다. 보안·군 부문의 특성상 19~49세 청년층이 대다수다. 알아흐마리 박사는 이런 인구 특성에 맞춘 진료 모델과 의료 전달체계를 설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내무부 의료망은 향후 3~4년 안에 클러스터 수준으로 자리 잡는 것을 목표로 한다. 2024년 9월부터 변화가 시작됐고, 관련 전략은 불과 몇 주 전에 승인됐다. 그는 “비전은 명확하지만 향후 5년의 전략에는 매우 치열한 노력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세 번째로 소개한 것은 지난 2년간 실제로 구현한 모델과 실천이다. 보안군병원 프로그램은 동부 지역 네트워크에서 시작해 일차의료기관을 구축하고, 예방 프로그램과 인구집단 건강관리를 추진했다. 알아흐마리 박사는 그 출발점이 의료 접근성이라고 강조했다. 정부 운영 병원으로서 운영 방식을 바꾸고 진료 건수와 진료 시간을 늘렸다. 그는 다른 기관 동료들이 공립병원을 바꾸는 일이 매우 어렵다고 했다며, 이것이 사우디 모든 국공립병원이 처한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성과를 위해 환자경험, 질, 안전, 운영 효율성에 중점을 두고 세 가지를 추진했다. 데이터 브리핑을 개선하고, 진료 시스템을 통합하고, 모든 일차의료기관을 병원과 디지털로 연결했다. 그 결과 환자 만족도는 92점까지 올랐다. 개선 단위 시스템을 도입해 질과 안전을 높였고, 국가 환자안전센터로부터 환자안전 표창도 받았다. 약속한 대로 데이터와 목표를 공개하고, 모든 이해관계자와 함께 검증하고 있다.
병원 밖 진료도 넓혔다. 모든 군 병원을 국가 플랫폼과 연결해 돌봄이 수혜자에게 닿도록 했고, 현재 전체 활성 수혜자의 28%가 병원 시설 밖에서 서비스를 받는다. 가상 케어(virtual care)에 집중해 가정 서비스와 가상 진료소에 투자를 늘렸다. 처방된 약을 환자 집으로 배송하는 시스템도 도입해, 환자는 약국에 가지 않고도 약을 받을 수 있다.
알아흐마리 박사는 국제 사회에 다섯 가지 교훈을 제시했다. 첫째, 부서가 아니라 환자의 여정 자체를 재설계한다. 둘째, 독립적인 제3자를 통해 성과를 측정한다. 셋째, 가장 취약한 영역을 찾아 먼저 해결한다. 넷째, 현장 실무자에게 권한을 주고, 안전 라운딩·리더십 라운딩·허들(huddle)로 모든 구성원의 의견을 모은다. 다섯째, 국가 프로그램을 비계(scaffold)로 활용한다. 그는 “이는 점진적으로 축적되는 것”이라며, 무엇보다 진료 접근성을 확보하는 데 성공한다면 목표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2. 거버넌스는 변혁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 싱가포르 NUHS, 전략·리스크·성과를 하나로 잇는 ‘세 개의 렌즈’
두 번째 연자. 웡수민(Soo Min Wong), 싱가포르 국립대학교 보건시스템(NUHS) 그룹 최고재무책임자(CFO)

두 번째 연사로 나선 웡수민(Soo Min Wong) 싱가포르 국립대학교 보건시스템(NUHS) 그룹 최고재무책임자(CFO)는 대규모 변혁을 관리하는 NUHS의 방식을 ‘세 개의 렌즈’로 설명했다. 전략과 리스크, 성과를 따로 다루지 않고 하나의 통합된 논의로 묶는다는 것이 핵심이다.
NUHS는 싱가포르 인구 약 600만 명 가운데 서부 지역 주민 약 120만 명을 담당하는 지역 기반 학술 보건시스템이다. 건강을 개선하고 미래의 의료시스템을 설계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모두가 혁신가’라는 원칙 아래 환자, 직원, 미래 창조, 지속가능성을 각각 맡는 팀을 운영한다.
웡 CFO는 어느 나라나 의료 운영 환경이 점점 복잡해지고 있다고 짚었다. 환자 여정은 사람·기술·프로세스·파트너를 통해 구현되는, 서로 연결되고 끊김 없는 경험이어야 한다. 특히 파트너가 중요하다. 이제 많은 일을 시스템 밖 파트너와 함께 해야 하고, 여기서 제3자 리스크라는 새로운 측면이 생긴다. 인구 변화, 커진 책임성, 연결성, 지속가능성 과제가 맞물린 환경에서는 연결 고리 하나만 끊겨도 큰 영향이 발생한다.
그래서 NUHS는 단순히 감독 기능을 수행하는 거버넌스에서 벗어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스튜어드십(stewardship) 중심으로 전환했다. 웡 CFO는 이를 자동차에 빗댄다. 앞유리(windshield)는 앞을 내다보게 하고, 가드레일(guardrail)은 경로를 이탈하지 않도록 잡아 주며, 북극성(North Star)은 목적지를 안내한다.
첫 번째 렌즈는 전사적 리스크 관리(ERM)다. 서로 연결된 위험을 식별·평가·완화하는 통합 프레임워크로, 웡 CFO는 “핵심어는 ‘연결된 리스크’”라고 말했다. NUHS는 호라이즌 스캐닝(horizon scanning)으로 새로 떠오르는 위험과 기회, 그 상호 의존성을 파악하고, 이것이 조직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평가한다. 최근 몇 년간은 통제 자가평가(control self-assessment)를 더했다. 스스로 평가한 뒤 외부 감사 등으로 결과를 검증하고, 이를 지속적인 개선의 기회로 삼는다.
두 번째 렌즈인 거버넌스는 지속 가능한 성장을 가능하게 하고 혁신에 대한 신뢰를 쌓는 기반이다. 웡 CFO는 “거버넌스는 대개 문제가 생겨야 다시 들여다보게 된다”라며 “훌륭한 거버넌스는 통제가 잘 작동할 때 눈에 띄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좋은 거버넌스는 가치를 지키지만, 강력한 거버넌스는 가치를 만드는 데도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세 번째 렌즈는 측정 가능한 성과다. NUHS는 개인의 책임을 보건시스템 전체의 성과와 연결하기 위해 환자, 인력, 미래, 지속가능성, 변화라는 다섯 가지 테마로 전사 균형성과표(balanced scorecard)를 운영한다. 매년 약 10개의 핵심 지표를 정하고 목표를 단계별로 나눈다. 기본 목표를 달성하면 1배, 미달하면 0.8배, 크게 초과하면 1.2배다.
이 결과는 직원 보너스와 직접 연동된다. 연말에 이사회나 독립적인 외부 기관이 성과를 평가해 1배가 나오면 보너스도 1배로, 1.2배가 나오면 그만큼 더 지급된다. 웡 CFO는 “핵심은 중요한 것을 측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측정에서 그치지 않고 다른 보건 클러스터와도 비교한다. 모두가 벤치마크를 달성했다면 이사회는 NUHS가 정말 뛰어난 것인지 다른 기관과 비슷한 수준인지를 따지고, 이를 통해 기준을 계속 높여 간다.
웡 CFO는 세 개의 렌즈를 실제로 적용한 두 가지 사례를 소개했다. 첫 번째는 AI다. NUHS는 ‘AI로 더 유능해지는 보건시스템’을 목표로 다섯 가지 축을 정했다. 리더십과 거버넌스, 프론트엔드와 백엔드를 아우르는 기술, AI 역량을 갖춘 인력 양성, 문화와 DNA, 그리고 투자 대비 성과를 내기 위한 재원이다. ERM으로는 사이버 보안, 데이터 보호, 환자안전, AI 모델 드리프트(AI model drift) 등의 위험을 모니터링한다.
거버넌스 측면에서는 국가 AI 가이드라인을 따르는 데 더해 ‘임상의가 함께하는(clinician in the loop)’ 체계를 도입했다. 웡 CFO는 “우리에게 AI는 증강을 위한 것이며, AI가 모든 것을 할 수는 없다”라고 말했다. AI는 아직 균형성과표의 성과 지표에 넣지 않았지만, 핵심 동력인 직원의 AI 역량 수준과 활용 사례는 별도로 추적하고 있다. 그는 도입과 확산은 항상 어렵다며, 문제를 찾아다니는 AI가 아니라 문제에 맞춰 설계된 AI인지를 살핀다고 덧붙였다.
3. 환자경험, 경영의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 평가·연결·도구·멘토링으로 변화를 지원한 협회의 실험
세 번째 연자. 카를로스 올리에테(Carlos Oliete), 스페인 카탈루냐 병원·보건·사회서비스협회(La Unió) 사무국 및 국제업무 매니저

세 번째 연사로 나선 카를로스 올리에테(Carlos Oliete) 카탈루냐 병원·보건·사회서비스협회(La Unió) 사무국 및 국제업무 매니저는 협회가 추진해 온 환자경험 프로젝트를 소개했다. 인력 부족과 지속가능성 등 협회가 마주한 과제는 여럿이지만, 그가 꼽은 것은 환자경험이었다. 핵심은 환자의 목소리를 듣는 데서 그치지 않고 병원의 의사결정과 경영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라 우니온(La Unió)은 인구 800만 명의 스페인 자치주 카탈루냐에서 150개 기관을 대표하는 협회다. 회원 기관에는 삼차 병원과 중소병원, 지방 병원뿐 아니라 일차의료기관과 정신건강 서비스 기관도 있다. 성격은 다르지만 비슷한 과제를 안고 있고, 협회는 이들을 연결해 지식을 나누고 변화를 실현하도록 지원하는 역할을 한다.
올리에테 매니저는 환자경험이 우선순위인 이유부터 설명했다. 환자는 명확하고 조율되며 존중받는 돌봄을 원할 뿐, 병원의 부서나 관리 구조에는 관심이 없다. 그런 만큼 환자경험은 의료를 조직하고 제공하는 방식을 개선하는 기준이 된다. 그는 “경청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가 내리는 결정에 그들의 목소리를 포함시켜야 한다”라고 말했다.
프로젝트가 다른 사업과 다른 점은 초점을 둔 자리다. 의료에는 세 가지 수준이 있다. 보건 당국이 전략과 우선순위를 정하는 거시 수준, 의료진이 매일 환자를 돌보는 미시 수준, 그리고 그 사이에서 병원이 자원·책임·프로세스를 결정하는 중간 수준(meso level)이다. 거시 전략이 실제 변화로 바뀌는 곳이 바로 이 중간 수준이며, 협회는 여기에 집중해 정책을 실천과 구체적 행동으로 옮기도록 돕는다.
협회는 프로젝트에 앞서 26개 회원 기관의 환자경험 현황을 평가했다. 대부분의 병원이 이미 환자경험 전담 부서를 두고 있었지만, 70%는 그 부서의 역할과 책임이 명확히 정의돼 있지 않았다. 80%가 환자보고경험지표(PREMs)를 활용하고 있었으나 환자보고성과지표(PROMs)를 활용하는 곳은 그보다 크게 적었다.
그래서 협회는 가이드라인만 만들고 끝내지 않기로 했다. 지원 모델은 네 가지로 구성된다. 첫째, 평가를 통해 각 기관이 현재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파악하도록 돕는다. 둘째, 워크숍과 세션으로 전문가들을 한자리에 모아 해법을 함께 찾는다. 셋째, 가이드라인과 표준 같은 실용적인 도구를 만든다. 넷째, 경험 많은 기관이 다른 기관을 돕는 멘토링을 운영한다.
이 모델은 세 개의 워크스트림으로 실행됐다. 첫 번째는 환자경험 전담 부서다. 각 기관 담당자들이 모여 환자경험 부서가 조직 내 어디에 놓여야 하고 어떤 책임을 맡아야 하는지, 환자경험팀·질 관리팀·진료과가 어떻게 협력해야 하는지에 대한 공통 표준을 함께 만들었다. 각 기관이 사정에 맞게 쉽게 적용할 수 있는 틀이다.
두 번째는 환자·가족위원회다. 올리에테 매니저는 “경청은 때로 환자를 의사결정에 참여시키는 것과 같지 않다”라며, 환자와 가족이 참여할 수 있는 체계적인 공간을 기관이 마련하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협회는 위원회 구성, 참가자 선정, 회의 운영, 후속 제안 처리까지 단계별 가이드를 만들었고, 14개 기관이 참여하는 멘토링 프로그램으로 경험 많은 기관이 이제 막 시작하는 기관을 돕게 했다.
세 번째는 환자보고경험지표(PREMs)와 환자보고성과지표(PROMs)다. 각 기관이 환자경험과 치료 성과를 어떻게 측정하고 활용하는지 파악하기 위해 다양한 설문을 모으고 130명 이상의 전문가를 한자리에 모았다. 그 결과 체계적으로 경험을 측정하는 곳은 60%였다. 올리에테 매니저는 이를 기술이 아닌 조직 문화의 문제로 보고 세 가지를 권고했다. 기관이 쓸 수 있는 지표 목록으로 측정을 표준화하고, 환자경험을 임상팀과 연결해 일상 진료를 개선하며, 데이터를 행동으로 바꿔 서비스를 재설계하는 도구를 만드는 것이다.
그는 확장 가능한 프로젝트에서 얻은 세 가지 교훈을 제시했다. 첫째, 환자경험은 경영진의 관리 영역 안에 있어야 한다. 리더십과 명확한 책임 없이는 변화를 이끌기 어렵다. 둘째, 경청과 측정만으로는 부족하다. 환자의 목소리와 PREMs는 의사결정에 반영되고 의료 개선에 쓰여야 한다. 셋째, 기관 간 협력은 실행을 쉽게 한다. 병원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필요 없이 지식과 모범 사례를 나눌 수 있다. 그는 “환자경험은 우리가 조직을 관리하는 방식의 일부가 될 때 비로소 혁신적인 변화를 이끌어낸다”라며 발표를 마쳤다.
4. 사람에 투자하고 사일로를 잇다 / 의사 부족 국가에서 조율 진료로 나아가는 폴란드
네 번째 연자. 야로스와프 J. 페도로프스키(Jarosław J. Fedorowski), 폴란드병원연맹 회장 겸 CEO

네 번째 연사로 나선 야로스와프 J. 페도로프스키(Jarosław J. Fedorowski) 폴란드병원연맹 회장 겸 CEO는 정부 주도의 규제와 시민사회의 상향식 이니셔티브가 함께 만든 폴란드 의료의 변화를 소개했다. 환자권리 제도, 데이터 보호, 디지털화, 의료인력 투자, 분절된 진료의 조율까지 폭넓은 사례를 제시한 그는 “우리는 할 수 있다. 사례가 스스로 말해 줄 것”이라며 발표를 맺었다.
연맹은 폴란드 병원 대부분을 대표하는 비정부기구로, 15년 전 그의 주도로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설립돼 지금은 IHF(국제병원연맹)의 어엿한 회원이 됐다. 그는 폴란드를 환자의 권리, 디지털화, 의료 혁신에 집중하는 일종의 ‘타이거 이코노미(고성장 경제)’라고 소개했다. 역사는 복잡했지만 1인당 GDP는 꾸준히 성장해 최근 일본과 대등한 수준에 이르렀다. 연맹의 비전은 ‘사람, 솔직함,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페도로프스키 교수가 가장 먼저 꼽은 것은 환자권리 제도다. 폴란드는 2009년 환자권리 옴부즈만(환자권리 위원) 사무소를 설립했고, 이 사무소는 매우 성공적으로 자리 잡았다. 환자 대기시간 관리와 점검, 사이비 의료 행위에 대한 대응, 그리고 무엇보다 무과실 환자 보상 기금이 대표적이다. 그는 “저 역시 의사이고 때로는 의사들을 상대하기 어렵기도 하지만, 환자들과 함께하게 돼 매우 기쁘다”라고 말했다.
아래에서부터 시작된 변화도 있다. 폴란드에는 비정부기구가 매우 많다. 모든 지역에 중소 규모 병원 협회가 있고 일부 지역에는 세 곳이나 있으며, 그 대부분이 연맹에 속해 있다. 환자단체도 풍부해 회원을 잘 돌보고 환자의 권리를 강하게 지켜낸다. 페도로프스키 교수는 정부가 규제하려는 사항도 있지만 시민사회와의 연대가 폴란드의 강점이며 실제로 효과적으로 작동한다고 강조했다. 데이터 보호도 연맹이 주도해 성공한 프로젝트다. 유럽과 미국의 규정을 바탕으로 보건의료 데이터 보호 행동강령(code of conduct)을 만들었고, 유럽연합으로부터 상을 받았다. 그는 “누구나 자국어로 번역해 바로 쓸 수 있다”라며 각국 참석자들에게 활용을 권했다.
폴란드는 폭넓은 디지털화를 이뤄왔다. 2000년 국가 e헬스센터(National Centre for eHealth)를 설립했고, 2011년 전자건강기록(EHR)을 도입했다. 코로나19 사태 1년 전에는 전자처방전을 도입해, 지금은 다른 방식의 처방전을 쓰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전자 진료의뢰(e-referral) 시스템과 온라인 환자 계정도 갖췄다. 올해는 대기시간을 줄이기 위해 온라인 사전등록을 도입했다. 여러 곳에 중복 등록이 쌓이면서도 조정이 이뤄지지 않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다.
폴란드는 조율된 의료 서비스 모델을 지향하며, 그 첫 단계로 의료인력 확보에 나섰다. 지금 폴란드 의료인은 유럽연합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급여를 받는 편에 속한다. 그는 “때로는 사람에게 투자해야 하며, 그것이 성과로 돌아온다. 이제 의사와 관련한 문제는 없다”라고 말했다. 오히려 몇 년 뒤에는 의사 과잉 공급이 예상돼 급여에 과도하게 투자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다.
지금 폴란드가 마주한 과제는 진료의 분절이다. 외래 진료와 일부 통합 시스템이 혼재돼 있어, 폴란드는 이 사일로(silo)를 엮어 가정의학과 전문 진료를 잇는 조율 진료(coordinated care)로 나아가고 있다.
대표 사례가 심근경색이다. 폴란드는 심혈관조영실(cath lab)이 고루 갖춰져 24시간 연중무휴로 심근경색 치료를 하고, 30일 이내 사망률은 유럽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다. 페도로프스키 교수는 “발을 다치거나 다리가 부러져도 심혈관조영실로 간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라고 말했다. 하지만 심근경색 이후의 관리는 조율되지 않았고, 이를 위해 올해부터 국가 심장학 네트워크를 구축해 재활까지 이어지도록 하고 있다.
병원들이 서로 상당히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상황에서 국가 병원 네트워크도 성과를 거둔 프로젝트다. 그는 “문제는 언제나 있지만 해법은 통합이다. 국가 병원 네트워크를 만들고, 기존 체계를 부수는 대신 개선해 제대로 작동하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렇게 하면 조율 센터를 중심으로 각 사일로가 조직화된 진료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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