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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혜리의 힐링여행] 중세 수도원과 현대미술volume.45 2024. 4. 1. 19:12
남프랑스 기행 #7
중세 수도원과 현대미술프랑스 남부지방에 가면 많은 수도원들이 있습니다. 세속을 떠나 신앙생활을 지속하는 수도원도 있지만 중세의 수도원들 중에는 현재 박물관 등 문화시설로 바뀐 곳도 많이 있습니다. 샤토 드 캬라귈에 있으면서 주변의 문화유적들을 많이 방문했는데, 그중 하나가 퐁 프루아드 수도원 Abbaye de Fontfroide 입니다.
지도를 보고 찾아갔는지, 아니면 차를 타고 나르본 Narbonne 방향으로 가다가 우연히 들렀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수도원 한 곳을 방문하겠다는 계획은 있었고, 그래서 고동색으로 그려진 '문화유적' 표지판을 보고 이 수도원을 찾았습니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말없이 서 있는 높고 넓은 담을 지나자 중후한 돌로 지어진 묵직한 수도원이 인상 깊게 다가왔습니다.
퐁 프루아드 수도원의 기원은 1093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중세에는 영주가 통치하던 지역에 성직자들을 위해 땅과 함께 자립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주었는데 나르본 자작이 베네딕토 수도사들에게 현재 수도원 부지를 주면서 만들어졌습니다. 수도원 근처에 수원이 퐁스 프리지두스 Fons Frigidus 였는데 거기에서 수도원의 이름을 따왔다고 합니다. 1145년 이후 본격적으로 발전을 시작했는데 수도사들은 시토회의 규율을 따르면서 성 베네딕트의 순결한 정신으로 돌아가고자 했답니다.
수도원 공동체는 80명의 수도사들과 250명의 형제들로 구성되었고 수많은 기부금과 토지 매입 덕분에 이 수도원은 한창 시절엔 2만 헥타 이상의 땅을 소유하면서 당시 기독교단에서 가장 부유한 수도원 중의 하나가 되었답니다. 14세기 이곳에서 교황 베누아 12세를 배출하는 등 위세를 떨쳤습니다만 시간이 흐르면서 내부의 부패와 타락도 심했다고 하지요. 프랑스혁명은 모든 수도원의 특권을 종식시켰고 이 수도원 역시 1791년 기독교 빈민구제 기구인 호스피스 드 나르본에서 관할하게 됩니다. 이곳의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이 나타나는데 장 레오나르 신부입니다. 신학대학의 수학교수였지만 문학과 과학문화에도 조예가 깊었고 경건함과 목가적 감각까지 지녔던 장은 이곳의 원장을 맡게 된 후 수도원을 지역의 명소로 만들었답니다. 그가 1895년 사망했을 때 나르본 전 지역에서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을 정도로 그는 지역에서 존경받는 인사였답니다.
1901년 교회와 국가 정치가 분리되는 법에 따라 마지막 수도사들이 이곳을 떠나고 1908년 이 수도원이 경매에 나왔을 때 구스타브와 마들렌 파예 부부가 이 수도원을 구입합니다. 구스타브 파예는 화가이자 박물관 큐레이터였고 예술작품 수집가로도 유명했던 그는 수도원의 복원과 재건축에 열정을 바쳤습니다. 오늘날에도 구스타브 파예의 후손들이 여전히 같은 열정으로 수도원을 박물관으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런 오랜 역사를 지닌 수도원에서 뜻밖에도 놀라운 것을 발견했습니다. 수도원 부속 예배당에 들어갔는데 작은 채플에 김인중 신부님의 작품이 그곳에 설치되어 있는 것입니다. 김인중 신부님(80)은 '빛의 화가', '빛의 사제', '스테인드 글라스의 왕'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화가입니다. 서울대 미대를 졸업하고 스위스에서 사제서품을 받은 뒤 1974년 이후 파리의 도미니크 수도회 소속으로 사제 활동을 하시며 스테인드 글라스와 회화, 도자 등 작품 활동도 열정적으로 해 오셨습니다. 프랑스 앙베르와 호주 애들레이드에 김인중 신부님의 미술관도 있습니다.
한국적 정서와 추상화를 접목한 그의 작품은 선과 여백, 밝고 강렬한 색채가 특징입니다. 생각지도 않은 장소에서 발견한 김 신부님의 작품은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벽에는 유화 작품이 걸려있고 그와 같은 주제로 스테인드 글라스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설명서를 보니 이 채플의 이름은 '죽인 이를 위한 예배당'이네요. 어느 영혼인들 이 작품과 함께 자유롭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수도원을 방문했을 때 또 다른 현대미술작품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옥시타니 지방에서 방문객들이 많은 여름 바캉스 기간 동안 지역의 유명한 역사적 기념물에 현대미술 작품을 설치하는 프로젝트의 일환이었습니다. 면류관을 상징하는 것 같은 스페인 작가의 작품이었습니다.
수도원에 현대미술이 설치된 이유를 지금 생각하니 이 수도원을 구입해 박물관으로 만든 구스타브 파예가 큐레이터였고 그 후손들도 그런 경향을 이어받아 현대 미술을 적극 포용하는 것인 듯합니다.
개인 소유이지만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는 퐁 프루아드 수도원은 아름다운 정원이 유명하고 와인도 만들어 테이스팅을 할 수 있습니다. 고요함 속에서 변화와 전통을 유연하게 수용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글. 함혜리 문화전문 저널리스트
함혜리
문화전문 저널리스트, 문화예술 전문 온라인 매체 <컬처램프> 발행인. 대학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하고 프랑스 파리 제2대학에서 언론학 박사과정(D.E.A.)을 마쳤다. 30년 일간지 기자 경력을 살려 문화와 예술의 저변을 확대하는 작업에 집중하고 있다. 저서로는 세 차례에 걸친 프랑스 체류경험을 바탕으로 쓴 프랑스 사회비평서 『프랑스는 FRANCE가 아니다』(2009), 대한민국 대표 예술가들의 인터뷰를 담은 『아틀리에, 풍경』(2014), 유럽 유수의 미술관 건축을 소개하는 『미술관의 탄생』(2015)이 있다.'volume.45'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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