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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주 병원 마케터가 바라본 짧고 얕은 문화이야기] 죽사 이응노 & 고암 이응노volume.38 2023. 9. 1. 18:15
인간에 대한 관심 전에 자연에 대한 동경이 있었네
사람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고 하지만,세월의 흐름에 따라 우리는 변한다. 20, 30대의 나와 지금 40대의 나는 하는 일도,생각하는 방식도 다르다. 좋은 쪽으로 변하고 나아졌기를 바랄 뿐이다. 그런데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나아간 예술가들에 비하면 나는 정말 아주 작은 변주에서 바뀌었을 뿐인 거 같다. 어쩌면 저렇게 변할 수 있지? 안주하지 않고 새롭게 시도할 수 있지? 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이들이 있다. 그 중 한 명이 바로 화가 이응노이다.
근현대미술사에서 이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응노의 상징과도 같은 군상도는 너무나 유명해졌다. 어느 전시장에서 만나든지 그 존재감으로 압도된다. 무수히 많은 사람이 다른 모양으로 춤추고 있는데 결국 하나로 엮어져 있고, 불타오르는 듯한 뜨거움이 함께 느껴지니 말이다.
이응노 스스로 그의 예술 시기를 20대에는 한국 전통동양화와 서예적 기법을 기초로 하고, 30대에는 자연물체를 사실주의적으로 탐구한 시대였고, 40대는 반추상적인 표현을 한 시대이고, 50대는 유럽에서 추상화를 시작한 사의적 추상의 시기이며, 60대는 서예적 추상의 시기로 구분하는 등 끊임없이 변화해왔다. 그런데 우리가 만나는 이응노의 많은 대표작들이 후반기 작품들이라 초창기 작품들을 만날 기회가 쉽지 않았다.
너무나 다르게 자연을 담아낸 이응노 & 박승무
그래서 그의 초기 작품을 만날 수 있는 전시인 ‘이응노와 박승무 : 70년만의 해후’ 전을 보러 전시 마지막 날 대전의 이응노미술관을 찾았다.
이응노미술관은 프랑스의 건축가 로랑보두엥이 이응노의 작품 <수>의 조형적 구조에서 영감을 받아 문자 추상을 건축적으로 해석해 설계한 건물이라고 한다. 전시장에 들어서기 전에 이응노미술관의 외관에 반하고 말았다.
둘 다 충청도가 고향인 이응노와 박승무는 박승무가 11살 위였고, 작품 스타일도 달랐지만 서로 존중하고 각각의 작품에 애정을 보여줬다. 두 사람 사이의 인연을 말해주는 편지도 전시되어 있었다. 전시장의 동선은 박승무의 작품부터 보여주고 이응노의 작품 세계로 이어진다. 박승무의 작품은 쌀알같이 붓을 사용하는 미점(米點) 방식으로 부드럽고 서정적으로 그려내고, 이응노의 작품은 자유롭고 거친 붓질과 추상화된 스타일이 돋보였다.
예술가는 자연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 모든 디테일을 그대로 그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이렇게 하면 본질이 사라져버릴 우려가 있다.
하지만 자연을 배반해서도 안 되는데 그러면 자연을 망가뜨리기 때문이다.
모든 요소는 자연의 모습으로 재현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미학 개념이다.
- 이응노 -자연을 담은 수묵담채화이지만 각각의 작품색깔은 너무 달랐다. 전통회화를 보여준 박승무 작품과 현대적인 추상 표현을 보여준 이응노 작품은 동양화라는 공통분모 아래에서 자연에 대한 긍정적 시선으로 동경을 다르게 표현해 냈다.
이응노의 작품들은 동양화라도 역시 남달랐다. 힘있게 뻗어있는 검은 대나무 숲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이응노는 호에 따라 두 시기로 구분할 수 있는데, 죽사였던 시기는 1923년에서 1940년대 중반이다. 해강 김규진을 스승으로 모신 이응노는 1923년에 그에게서 ‘대나무처럼 항상 푸르라’는 의미의 ‘죽사’를 호로 받고 꾸준히 동양화에 매진했다. 이 시기의 작품들을 찬찬히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특별한 시간이었다.
전통 서양화에서는 사물을 보지 않으면 그림을
그리기가 어렵다. 나는 자연적인 대나무를 완전히
내 것으로 소화시켰다. 대나무 그림을 그릴 때
붓을 다듬으면서 이미 내 머릿속으로는
그림이 어떻게 이루어질지 구상하고 있다.
- 이응노 -1930년대 후반부터는 죽사와 고암의 호를 번갈아 썼다. 그 이후가 고암 시기로 1940년대 중반에서 1989년 시기이다.이때 실물과 경치를 관찰하고 탐구해 자신만의 조형언어로 해석하고자 했고, 1950년대에 접어들면서 그의 작품들 속 필치는 더욱 간결해졌다.
일본에서 한국으로, 그리고 다시 파리로 나아간 세계적인 화가
그렇다면 여기서 이응노의 삶에 대해 한번 짚어보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을 살았으니.
그는 염재 송태희 선생에게 묵화의 기본을 배우고,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1923년에 경성부에서 당시 유명한 서예가였던 해강 김규진의 문하생이 되어 배우고 죽사라는 호를 받았다. 조선 미술전에 ‘묵죽’을 출품해 입선하는 등 작품활동을 하다가 개척사란 간판가게를 운영하기도 했다. 그림은 계속 그리며 1931년 조선미술전람회 사군자부에서 특선을 차지하고, 1933년에는 규영 정병조 선생에게 고암이란 호를 받았다.
그러던 그가 아내 박귀희를 포함해 가족과 함께 1935년 일본에 간 건 그림을 더 배우기 위해서였다. 일본 도쿄 가와바타 미술학교에서 수학했고, 일본 남화의 대가 미츠바야시 게이게츠에게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이 시기 일본 미술협회전에서 풍죽으로 입선하고 그 외 작품도 꾸준히 그려나갔다.
1945년 42세가 된 이응노는 해방 후 돌아와 충남 예산의 수덕 여관을 인수해 박귀희가 운영을 하게 하고, 그는 작품활동을 계속했다. 1948년 홍익대학관(현 홍익대학교)에 부임해 재직하며 꾸준히 작품활동을 했고, 1954년에 경주 서라벌 예술대학 동양화가 교수로 취임했다. 이렇게 국내에서도 끊임없이 그림을 그리고 자신의 영역을 개척해 나가던 그는 1958년 12월에 한국을 떠나 프랑스로 작품 무대를 바꿨다. 이때 제자였던 21살 어린 화가 박인경과 함께 떠났는데 사실상 부부관계가 되었다. 1954년 서독대사의 주선으로 서독을 방문해 1년간 체류하고, 독일 본 시립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가지기도 했다.
1960년 1월에 파리에 정착하고 난 후 그의 삶은 궁색해 졌다. 작품을 제작할 재료가 없어서 뜰에 버려진 낡은 컬러판 잡지를 주어 물감 대신 캔버스에 붙이며 콜라주 기법을 발견했는데 단순히 뜯어 붙이는 것이 아니라 붓글씨를 쓸 때 느껴지는 획이 이 과정에 부여되어서 특별한 작품이 되었고, 이 시기 작품은 콤포지시옹(Composotion)이라 칭해지면서 파리에서 인정받게 되었다.
불운의 역사 속에서 전통 서화를 통해 현대적 추상화를 창작한 거장
문자 추상시기가 도래했던 그의 작품시기에도 동양적 표현 정신과 여전히 밀착되어 그만의 색깔을 냈다. 이렇게 프랑스 파리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파리뿐 아니라 미국, 스위스, 덴마크 등에서도 개인전을 할 만큼 활동을 꾸준히 했지만 1967년 북한공작원에게 속아서 한국전쟁 때 납북한 첫째 아들을 만나기 위해 동독 동베를린에 갔다가 중앙정보부에 의해 동백림 간첩단 사건으로 엮여 고국으로 유인되어 와서 수감생활을 했다. 분단의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의 너무 슬픈 가족사이기도 하다.
감옥에서도 그는 작품활동을 쉴 수 없었다.나무 도시락을 이용해 작품을 만들고 밥풀로 붙이고, 고추장과 간장으로 색을 냈다. 그렇게 만든 옥중작품이 300여점이라고 한다. 종신형을 선고받았지만, 해외에서도 석방운동을 할 정도로 이슈였고, 그는 1969년 3월에 광복절 특사로 사면을 받았다. 석방 후 첫번째 아내인 박귀희가 있는 수덕여관에서 요양을 하다 프랑스로 돌아갔다.
*사진설명 : <구성>과 <작품>은 이응노의 1970년대 문자추상경향을 보여주는 대표작으로 모두 천위에 제작한 작품이나 기법적으로 다른 양상을 보인다. <구성>은 융 같은 표면에 물감으로 그려 붓터지가 보이고 <작품>은 천 위에 문자 형상의 다른 색 천으로 붙인 후 붉은 색 실로 꿰맨 듯한 기법으로 제작했다.
그 이후 한국에서 작품활동은 정치적 이유로 못하다가, 1977년 백건우 윤정희 부부의 북한 납치미수 사건과 관련해 두 번째 아내 박인경이 연관되었다고 알려지면서 한국과는 완전히 단절되었고, 1983년에 프랑스 시민권을 획득했다.
그의 대표 작품인 군상 시리즈는 이 시기의 작품이다. 후기 문자추상에서 보이던 장식적 양식들이 점차 사랑의 모습으로 변형되어 표현되고, 2인이나 5인이었던 등장인원에서 1985년 이후부터 대량의 군중이 출연하면서 군상의 이미지가 작고 반복되며 화면 전체를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한국 사람들은 1980년 광주사태이후 군중들의 모습을 연상하고, 유럽 사람들은 반핵운동으로 바라보았는데, 양쪽 모두가 자신의 심정을 잘 표현한 거라고 이응노는 말했다.
삶의 후반부에서 그는 인간에게 깊이 접근하고 인간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인간을 중심에 두고 평화를 염원했던 그는 85세 생일을 앞두고 1989년 심장마비로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났다. 불운한 시대에 태어나 한 평생을 보낸 그를 보면서 이념적인 시각으로 그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고 또 앞으로도 바뀔 수 있겠지만, 그가 예술혼을 불태우며 만든 작품들은 앞으로도 우리 곁에서 계속 빛나고 있을 듯 하다.
글. 이현주 병원 마케터
이현주
글쓴이 이현주는 바른세상병원에서 홍보마케팅 총괄을 하고 있는 병원 마케터이다.병원 홍보에 진심이긴 하지만, 한 때 서점 주인이 꿈이기도 했던 글쓴이는 독서와 예술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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