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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Column] 건축가, 메디컬 플래너 / 김천행volume.22 2022. 5. 2. 17:23
나는 병원에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병원에서의 시간이 연구의 시간이고, 공부하는 시간이라 생각한다.
일정 기간 병원에 파견 나가서 의료 계획할 때 병원 직원식당에서 밥 먹는 것을 즐겨 한다. 병원마다 특색이 있고, 대부분 간이 세지 않고, 매일 메뉴가 바뀌고, 의료진, 직원들의 모습을 매일 볼 수 있는 것이 좋다. 밥 먹고 나면, 병원 내에서 커피를 마시며 환자들과 보호자들의 모습을 보고, 복잡한 로비에 우두커니 앉아서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이 병원의 장점은 무엇일까? 이 병원에는 무엇이 더 필요할까를 생각해 본다.
출근할 때는 마치 내가 병원 직원같이 느껴지고, 새벽 회의가 있어서 병원에 갈 때는 먼저 가서 청소하시는 분들, 물품 나르느라 바삐 움직이시는 분들, 먼저 오신 환자들을 보면서, 은은한 조명 속의 로비와 텅 빈 대기의자와 접수창구를 바라보면 참 편안하다. 퇴근할 때는 불 꺼진 로비를 지나 병원 입구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던 많은 휠체어를 보면서 “너희들도 오늘 많은 일을 했겠다. 수고했다”라고 말해준다.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서양식 병원의 역사는 얼마 되지 않았다. 1884년 갑신정변 때 총상 환자를 의사인 알렌 선교사가 살리게 되어 1885년 광혜원, 제중원이 만들어졌고, 비슷한 시기에 제생병원 같은 일본인을 위한 병원도 건립되었다. 이후, 관 주도로 만든 병원들, 선교사들이 주축이 되어 건립된 사립병원들, 해방 이후 국내 자본에 의한 민간병원들 등, 많은 병원이 건립되었고 함께 발전해 왔다.
우리나라의 의료계획 역사는 얼마나 되었을까? 자료가 없어서 잘 알지 못하지만, 초기에는 사용자들인 의사들에 의해 주도되고 설계사무소에서 건축적인 내용을 서포트해 주는 시스템이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리고 점차 현대화되면서 병원의 내부 시스템을 외국, 주로 일본에서 병원 건축을 공부한 분들에 의해 발전되었고, 사회가 안정되고 세계화되면서 대형병원들이 생겨나고 건축주들도 외국의 병원 시스템을 도입하기 원했고, 그 결과 미국과 일본의 설계사무소에 의해 새로운 병원 컨셉이 반영되고 설계가 진행된 것 같다. 지금도 우리나라의 대형 병원들의 많은 수가 외국 설계사무소의 손을 거쳐서 설계되고 있지만, 간삼건축이 외국 설계사무소의 도움 없이 800병상, 1000병상의 대형 병원을 설계한 것이 뿌듯하게 느껴진다.
내가 병원 설계를 시작한 것은 1999년 명지병원을 진행하면서이다. 기존 소규모 병원건물 증축설계부터 약 5년간 설계와 감리, 설계 변경, 추가 증축설계를 연이어 수행하여 최종적으로 병동 2개동에 17,000여 평으로 완공하였고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하게 된 것이 좋은 경험이 되었다.
명지병원을 시작할 때는 처음 접하는 병원 프로젝트라 초기에는 힘들었다. 그래서 서점에서 “병원”이라는 키워드가 있으면 가능한 전부 뒤져보았고, 인터넷에서 병원에 대한 자료를 찾고, 병원에 관련된 영화도 보고, 병원 의료진들이 쓴 책도 보고, 일부러 병원을 가서 둘러도 보고, 잘 아는 병원 설계의 선배에게 자료도 얻고. 이렇게 병원 설계를 하나씩 알게 되었다.
그동안 여러 프로젝트를 하면서, 병원장님과 머리를 맞대고 계획하던 일들, 건양대병원에 파견되어 있는 기간 동안 아흔되신 설립자님께서 직접 설계팀에 오셔서 함께 계획하던 일, 분당서울대병원 감염병동 설계 때 당시 비어 있던 전망 좋은 VIP병실에서 작업하던 일 등 병원에서의 모든 시간들이 나에게는 행복한 기억들이다.
메디컬 플래너는 바둑 둘 때 한수 한수에 고뇌하는 기사와 같다. 짜여진 틀(면적) 안에서 최선의 수를 두어야 하는 것이기에, 최선의 방안을 제안하여야 한다. 의료진과 생각이 맞지 않으면 더 좋은 수를 생각해야 하고, 이를 위해 마스터플랜으로 병원의 미래를 제시하고, 협의하고, 설득하고, 완성품이 될 때까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 미국 병원 투어를 갔을 때 미국 설계회사의 메디컬 플래너에게 그 회사에는 메디컬 플래너가 몇 명이나 있는지 질문한 적이 있다. 그때 답변이 아마 50~60명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많을 수 있나? 내가 알고 있는 메디컬 플래너는 의료 계획을 리드하는 사람이라 생각해서, 우리나라 설계사무소를 다 더해도 그 정도 될까 싶은데라고 생각했는데. 얼마 전 의문이 풀렸다. 미국의 메디컬 플래너 채용공고를 보니, 메디컬 플래너의 채용조건은 건축 또는 관련 분야 학사학위 보유자, 의료 계획 수행자, Revit, AutoCAD 및 3D 모델링 소프트웨어, Excel 등 여러 프로그램의 숙련자, 리더십 있고, 프레젠테이션 잘하는 사람 등이었다. 이 중 Senior Medical Planner는 건축 또는 관련 분야 학사학위 또는 석사 학위, 의료 계획 10년 이상 ~ 14년 이상인 사람. Medical Planner는 건축 또는 관련 분야 학사학위, 의료 계획 5년 이상 ~ 8년 이상인 사람. Junior Medical Planner는 건축 또는 관련 분야 학사학위, 의료 계획 3년 이상인 사람 등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기준이 특별하지는 않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현재 간삼건축의 경우, 700~800병상 이상의 대형 프로젝트를 여럿 수행한 덕분에 병원의 시스템과 의료 계획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한 메디컬 플래너들이 다수 포진해 있다. 이들이 디자인과 건축 계획, 의료 계획 3가지를 다 갖추고 있어서 메디컬 플래너로서의 미래가 기대된다.
병원은 아픈 사람들을 낫게 하는 치유의 장소이다. 환자와 보호자들에게는 치료의 과정을 이겨내야 하는 힘든 장소이다. 나도 언젠가는 이런 신세를 지겠지만, 20년 넘게 메디컬 플래너로 병원 설계를 해왔던 나에게는, 병원 설계를 위해 병원에서 지내는 때가 병원을 더 이해하는 시간, 병원의 변화를 느끼는 시간이라 생각한다. 우리나라에 대형 병원이 많기는 하지만, 병원은 계속 성장하고 있고, 증축과 내부 리모델링이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사회 변화에 따라, 의료법, 병원평가, JCI, 과별 기준이 계속 변하고 있다. 게다가 예상치 못한 메르스, Covid19로 인해 대 변혁 또한 발생하였다. 병원 정책과 병원의 변화를 체감하게 한다.
이런 흐름에 병원 설계가 다리가 되어야 하고, 메디컬 플래너들의 역할이 참 중요하게 느껴진다. 변화에 대응하는 좋은 병원을 계획하기 위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더 많이 연구하고 고민해야 되는 이유가 아닐까. ■
글. (주)간삼건축 김천행 건축가/상무_ 의료시설 설계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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