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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숙 간호부장의 노인병원 애상] 생의 마지막 순간 사랑의 말을 전해주세요volume.14 2021. 8. 31. 13:13
아버지 임종을 못 보았습니다.
평소 보호자들에게는 오시는 동안 사망할 수 있다고 얘기하곤 했었는데, 막상 아버지가 가시는 순간 손도 못 잡아 주고 귀에다 목소리 한 번 못 들려 드린 것이 이토록 섭섭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가시는 순간까지 함께 해준 주치의와 간호사들이 그토록 고마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CS팀이 생각 해 냈습니다. 가족의 임종을 못 볼 수 있는 것에 대비해 미리 환자들에게 마음의 편지를 들려 드리기로 했습니다. 가족 모두가 손수 적어 전해주신 사랑의 편지를 임종의 순간이나 평소 외로워할 때 읽어 드리기로 계획했습니다. 막상 임종이 다가와 곁을 지켜도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둔 말은 못 꺼낼 수 있습니다. 특히 아들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떠나신 후에야 후회한들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술을 무척 좋아 하셨습니다. 그래서 적당히 드시질 못하고 항상 술이 술을 먹으면서 술버릇으로 말이 많아지는 분이셨습니다. 평소 말 못 하던 얘기도 술만 들어가면 큰소리치는데, 그 말이 보편적인 말이 아니라 평소의 불만, 말하지 못하고 가슴에 꽁하게 담아 두었던 말들입니다. 그것도 싫었지만 매일 술을 드셔서 추운 날에 길바닥에 넘어지거나 다치기도 해서 아들은 혹여나 객사할까봐 노심초사했고, 욕하고 소리소리 지르는 모습에 창피해하였습니다.기분 좋게 식사를 사 드려도 밥은 거의 안 드시고 술만 들이키는 분이셨습니다. 난 그런 아버지를 미워하여 같이 소리 지르고 술병을 빼앗아 버리기도 하고, '이러면 중환자실에서 오래 계실 거다'라고 말씀드려도 아버지는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비웃곤 하셨습니다.
하루는 전화를 드렸더니 어눌한 목소리로 받으시길래 난 또 술이 취한 줄 알고 '지겨워!' 하고 전화를 끊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때 이미 뇌경색이 발병한 상태였습니다. 병원에 입원하셨을 때는 예상을 했던 터라 그다지 놀라지 않았지만, 혈관성 치매로 인한 인지 장애 때문에 난폭해져 사지가 묶여 있는 것을 보니 기가 막혔습니다. 치매 병동을 수십 년 맡아 간호하던 내가 수많은 공격적인 환자를 보고 환자 안전이 우선이라며 보호자에게 신체 보호대 동의서를 받고는 하였는데, 막상 내 아버지가 사지가 묶여 있는 것을 보고 역시 경험 해 보지 않고 100% 공감할 수 없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평소 6.25 회장으로 대통령에게 훈장도 받고 장례식장에 근조화환과 수의도 받은 분이신데, 사지가 묶여 꼼짝도 못하고 난폭하다고 진정제를 놓으면 기운이 없이 축 늘어진 모습을 보니 저러다가 인지가 더 떨어지면 어쩌나 노심초사하였습니다. 아, 이것이 진정 보호자의 마음이구나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다행이랄까, 그 후로는 우려하던 것과 다르게 항상 잘 웃는 예쁜 치매가 와서 병동에서는 사랑받는 환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간절히 바랬습니다. 인지 능력이 빨리 돌아와 아프기 전 내가 왜 그토록 술 먹는 것을 싫어했고, 왜 그렇게 술 드시다 중환자실 간다고 협박했는지를 알아주기를 바랐습니다. 아버지가 웃기지 말라고 큰소리치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분명 내게 섭섭했을 겁니다. 그래서 모든 것들에 후회만 남습니다.
그러나 난 오히려 입원 후의 아기 같아진 우리 아버지가 좋습니다. 어쩌다 몰래 모시고 나가 술을 사드리려 하면 오히려 아버지가 "술 먹으면 안 돼!"라고 말씀하셨을 때 마음이 먹먹했습니다. 얼마나 술 먹지 말라는 소리를 지겹게 들었으면 그 기억이 남아 저렇게 얘기할까 싶어 또 가슴이 저려왔습니다.
역시 치매는 인생의 휴식 기간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일찍 자신의 아버지를 여의고 가장으로 살아 온 억척같은 분이셨습니다. 사업에 몇 번 실패해도 자식들을 고생시키지는 않았습니다. 우린 아버지 덕분에 정말 고생 안 하고 어찌 보면 부유하게 살아 왔습니다. 그것이 정말 고마웠습니다.
외로울 정도로 인생의 낙(樂)이 없으셔서 술을 드셨다는 건 이해가 됩니다. 눈도 잘 안 보이고 귀도 잘 안 들려 성질 사나워진 마누라 때문에 속도 많이 터졌을 것 같은데, 항상 우리들에게 엄마 불쌍하다고 하신 인정 많은 분입니다. 아버지가 입원해 계시는 동안은 많은 추억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먹는 것만 주면 애기처럼 좋아하셨고 단 것 싫어하던 분이 빵과 맥심 커피를 주면 좋아하셨습니다. 추억이 많으면 좋을 줄 알았는데 그 추억으로 인해 돌아가시고 너무도 그리워집니다. 정말 다시 한번 살아나신다면 함께 코로나로 못한 맛있는 식사도 사드리고 좋아하는 술도 사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코로나가 길어지면서 가족들 얼굴도 제대로 못 보고 손도 못 잡고 같이 모시고 나가서 맛있는 것도 못 사드리는 우리 어르신들에게 무엇을 해 드릴까 고민하다 환자 만족도를 위한 공모전을 하여 여러 가지 실시 계획안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그 중에는 “센트럴 DJ”라는 음악 방송을 신청곡을 받아 대학 때 아르바이트로 하던 DJ 경험을 토대로 사연과 함께 추억의 노래를 들려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은 000호 어르신의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즐겨 부르던 000 노래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우리 모두 두 분의 영원한 사랑 속으로 들어가보시기 바랍니다.”
나른한 오후 추억의 음악을 들으며 날마다 새로 태어난 듯이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들은 모두 나의 아버지십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아버지를 정성으로 돌봐준 00 요양 병원 간호사들과 담당 주치의에게 다시 한번 고마움을 전합니다. 아버지가 갑자기 사라져 찾는다는 같은 방 어르신들을 찾아뵈야겠습니다.
글. 최경숙 서울센트럴 요양병원 간호부장
최경숙
현) 서울센트럴 요양병원 간호부장
현) 요양병원 인증 조사위원
전) 대한간호협회 보수교육 강사
전) 요양병원 컨설팅 수석팀장'volume.14'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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