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진우 건축가의 '함께 떠나고 싶은 그곳'] 사라진 풍경ARTICLE 2026. 7. 3. 08:30
사라진 풍경
환자가 신체 일부를 잃었음에도 그 부위가 여전히 존재한다고 느끼거나 극심한 통증을 겪는 현상을 '환상지 증상(Phantom Limb Sensation)'이라고 한다. 육체는 잘려 나갔지만 신경망의 기억은 끊어지지 않아 발생하는 인지적 오류다. 요즘 나는 어느 날 갑자기 신기루처럼 사라진 서울의 한 풍경을 마주하며, 이 지독한 환상지 통증을 앓고 있다.




눈앞의 현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날것의 충격을 주는 장소가 있다. 최근의 한남동이 그렇다. 한남대교 북단을 지날 때면 왼편 언덕 위로 저밀도의 작은 집들이 겹겹이 포개지고, 그 정점에 교회가 우뚝 솟아 있던 독특한 스카이라인이 눈에 띄곤 했다. 나에게 서울 강북의 가장 인상적인 풍경 중 하나였던 그곳이 최근 한남뉴타운 3구역 개발로 흔적도 없이 쓸려 나갔다.
불과 얼마 전까지 가파른 언덕을 따라 촘촘히 들어서 있던 낡고 붉은 벽돌의 다세대, 다가구 주택들과, 그 꼭대기에서 이 동네의 이정표 역할을 하던 '꼭대기 교회(한광교회)' 주변의 풍경은 마치 갑자기 실종된 현실 같다. 폭격을 맞고 무너져 내린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참상을 떠올리게 할 만큼, 한꺼번에 모든 것을 밀어버린 도시의 개발 방식은 잔인하고 황량하다. 나아가서 시민들에게 폭력적이다. '떠나고 싶은 그 곳'이라는 칼럼 제목이 무색하게 이제는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장소가 되어버렸다.



우리는 종종 도시를 불변의 존재로 인식하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과거는 그저 낡고 불편하여 부수어야 할 대상이며, 미래는 오직 깨끗하고 새로운 것으로만 채워져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그러나 건축가의 시선으로 바라본 한남동의 옛 풍경은 결코 낙후된 과거에 머물지 않는다. 그곳은 골목길마다 소박한 일상의 흔적들이 켜켜이 쌓인 소중한 '기억의 층위'이자, 도시의 역사 그 자체였다.
이토록 거대한 면적을 단숨에 지워버리는 폭력적인 재개발은 필연적으로 질문을 남긴다. 화려한 조감도 속 미래를 약속하며 이주한 원주민들의 재입주율은 과연 얼마나 될까. 새롭게 들어설 고급 주거 단지는 결국 사람을 밀어내고 자본을 채우는 또 다른 젠트리피케이션의 무덤이 아닐까. 장소에 깃든 삶의 맥락을 완전히 뿌리 뽑은 자리에 세워질 세련된 고층 콘크리트 숲이 과연 누구를 위한 풍요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모든 건축물은 사회적 생명력을 가졌기에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기 마련이지만, 이번 소멸은 유독 아쉽다. 그래서 나는 사라진 풍경에 대한 오마쥬로서, 펜 끝과 물맛을 담아 이태원·한남동 언덕배기가 가진 '거칠지만 따뜻한' 기록을 엮어내려 했다.




이 스케치들은 사라진 풍경에 대한 기억과 펜 끝으로 다시 엮어낸 삶의 지층이다. 그림 속 다닥다닥 붙은 집들은 단순히 건물이 아니라, 오랜 시간 층층이 쌓인 서울의 지질학적 나이테다. 선으로 그려진 가파른 계단과 창문들, 옥상 위에 삐죽 솟은 안테나와 전신주는 이 언덕이 얼마나 많은 사람의 사연을 만들어 왔는지 증명한다. 무질서해 보이는 이 집들이 서로의 어깨를 기댄 채 하나의 거대한 봉우리를 이루고, 그 정점에 한광교회가 우뚝 서 있다.
언덕배기 차곡차곡 쌓여진 집들은 서민들의 고단함과 애환이 퇴적되어 있다. 길과 집, 담벼락의 거친 질감과 대조적으로, 저녁 하늘은 석양의 옅은 자줏빛과 오렌지빛이 섞인 수채화 물감으로 부드럽게 번져 간다. 낮 동안의 치열했던 소음이 잦아들고, 세상이 보랏빛으로 잠기기 직전이다. 붉은 벽돌의 교회당과 다양한 모양의 집들이 하늘의 빛을 받아 각자의 색을 조금씩 내어주며 하나의 조화로운 화음을 만들어 낸다. 수직으로 솟은 교회의 첨탑은 하늘을 향한 갈망을 나타내지만, 그 아래로 넓게 펼쳐진 주택들의 군락은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현실의 고단함을 보여준다. 첨탑의 끝 십자가는 하늘에서 내려온 평안을 온 동네에 흩뿌려 주는 안테나다. 비탈진 길을 올라온 이들에게 교회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에게 묵직한 위로를 건넨다. 펜의 가는 선과 담채로 만나는 부드러운 색상의 조화는 이태원·한남동 언덕배기가 가진 '거칠지만 맑고 따뜻한' 느낌을 표현한다.
나는 건축가로서 사라지는 건축의 풍경을 그림으로 기록하는 일이 의미 있기도, 의무이기도 하다. 그동안 작업 해왔던 한광교회와 경사진 마을의 기록을 통해 그동안 쌓여진 추억들과 사연들은 오래도록 나의 그림 안에 남아서 아름답게 존치되기를 바란다.

사라진 풍경의 환상통잘려 나간 언덕배기
서울의 한 귀퉁이가 통째로 지워졌다
현실은 비워졌으나 신경망은 아파라
서로 어깨를 기대고 서 있던 붉은 벽돌집들과
지상의 고단함을 위로하던 꼭대기 교회
기억의 지층은 단숨에 쓸려가고
그 자리, 자본의 콘크리트 숲이 서늘하게 들어선다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장소
나는 펜을 세우고 노을빛을 번져
그곳의 거칠고 따뜻했던 숨소리를 묶는다
도시는 기억을 지웠으나
고단한 애환이 퇴적된 서울의 나이테는
나의 그림 속에서 오래도록 남으리라

글/그림. 임진우 (건축가 / 정림건축)
한국의료복지건축학회 부회장
'ARTICLE' 카테고리의 다른 글
[Special Column] 삶이 온전하게, 함께, 그리고 존엄하게 이어지는 미래형 시니어 하우징-2 (0) 2026.07.03 [편집장 FOCUS] 제43회 고령사회포럼 (0) 2026.07.03 [정경의 병원 중간관리자 이야기] 태움은 왜 유독 병원에서 생기는가 (0) 2026.07.03 [헬스케어트렌드 AI웰니스] 배달의 미래, 사람과 로봇이 함께 만드는 새로운 물류 생태계 (0) 2026.07.03 [조병규 건축사 칼럼] 건축가로 산다 (0) 2026.07.03 [BOOK 신간소개] 글로벌 브랜딩 (0) 2026.07.03 [인투익스의 의료공간 인사이트] RE:NA 여성의원 (0) 2026.07.03 [의사가 들려주는 병원경영 이야기] 세계의 내분비 병원 (0) 2026.07.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