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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주 병원 마케터가 바라본 짧고 얕은 문화이야기] 삶의 가장 빛나는 순간은 바로 지금이군요!volume.33 2023. 4. 4. 22:45
나이는 숫자에 불과했던 화가들,
앙드레 브라질리에, 그랜마 모지스, 그리고 황용엽Ⅰ. 94세의 현역 화가 <앙드레 브라질리에>
얼마 전 프랑스 미술 황금기 거장들의 정신을 이어받은 마지막 화가라 불리는 앙드레 브라질리에 전시회를 찾았다. 푸른색 나무가 가득한 숲에서 푸른색 말이 달리고 있었다. 판타지가 분명한데 저 말들의 움직임이 너무나 역동적이었고, 내 앞에서 움직이는 듯이 가슴이 뛰었다. 톤 다운된 조명 때문이었을까? 숲 속에 달리는 말들 위로 흩날리듯이 뿌려진 흰 눈은 어릴 적 처음 만난 눈을 보는 것처럼 설렜다. (사실 그 감정이 극대화되어서 작품을 보다 울컥하고 말았다.)
94세의 현역 화가의 작품은 여전히 아름다웠고, 삶의 빛나는 순간을 작품 가득 담아내고 있었다. 젊은 시절 또렷했던 꾹꾹 눌러쓴 글씨 같았던 작품들은 나이가 들면서 경계선은 흐트러졌지만, 그는 오히려 더욱 깊이 있는 감정선을 보여주었다.
11세 이후 80여 년이 넘는 동안 그의 손에는 항상 붓이 들려 있었다. 브라질리에의 작품 속 주제는 서커스와 음악, 말, 바다와 강, 숲이 꾸준히 반복되었다. 그의 작품은 시와 같이 찬란하고 아름답고 기쁘게 하는 것들로 가득하다. 화가의 시대가 끝나지 않았음을 그림으로 보여주며, 자유롭게 작품 속에서 노닐고 있는 그에게 나이는 진정 숫자에 불과했다.
나이가 들수록 그의 작품에는 편안함이 가득했고, 사랑의 온기가 느껴졌다. 푸른색이 차갑지 않고 따뜻한 온기를 느끼게 하는 힘은 브라질리에이기 때문에 가능한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의 곁에서 함께한 뮤즈 ‘샹탈’. 그의 작품 속에서 뮤즈인 그녀의 모습을 많이 만날 수 있다. 그에게 회화란 삶의 증언이자 살아있는 감정을 느끼는 노력인 것이기에 뮤즈인 그녀가 함께 해 온 것은 당연한 일인 듯하다. 그의 작품을 바라보면서 참으로 행복했고, 나이가 들어감에도 식지 않는 그의 작품에 대한 열정에 감탄한 시간이기도 했다.
“삶과 아름다움을 사랑하도록 돕는 것, 그것이 ‘예술’ 아닌가요?”
–앙드레 브라질리에
Ⅱ. 75세에 그림을 시작한 화가 <그랜마 모지스>
그랜마 모지스, 모지스 할머니로 불리는 애나 메리 로버트슨 모지스 화가. 사실 그녀의 작품을 인터넷에서 본 적은 있지만 그녀에 대한 스토리는 잘 알지 못했다. <모지스 할머니, 평범한 삶의 행복을 그리다>란 책을 우연히 읽으면서 그녀에 대해 알게 되었다.
작품 속에 너무나 섬세한 묘사를 보고 난 후 그 작품을 그린 시기의 그녀 나이를 안다면 모두들 깜짝 놀라고 말 것이다. 평생을 농장에서 일해 왔던 그랜마 모지스는 75세에 자수를 놓기 어려워지자 처음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101세까지 살면서 1600여 점의 작품을 남기며 미국인이 사랑하는 국민 화가가 되었다고 한다.
그녀는 서툴지만 진심을 담아 그림을 그려 나갔고, 자신이 살았던 농장의 모습, 마을 사람들의 일상, 마을 풍경을 화폭 곳곳에 담아냈다. 그랜마 모지스가 그려낸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행복은 많은 이들에게 긴 여운을 주었고, 88세에는 ‘올해의 젊은 여성’으로 선정되었고, 93세에는 ‘타임’지 표지를 장식했고, 100세 생일날에는 뉴욕시가 ‘모지스 할머니의 날’을 선포해서 모든 이들에게 축복을 받았다고 한다.
100세가 넘어서 그린 작품 250점이라고 하니 그녀가 매 순간 순간 얼마나 열정적으로 그림을 그렸는지 예측이 된다. 사실 그녀의 작품이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을 때 미국 화단과 평단에서는 외면을 받았다가 민속미술 부흥과 함께 뒤늦게 예술로 재평가받았다고 한다.
정작 그랜마 모지스는 그런 외부 관심이나 평가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 것에 신경 쓰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아 그보다는 다음에 어떤 그림을 그릴지를 생각했다고.
새로운 것을 시도할 때 너무 늦은 것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 때 그랜마 모지스를 떠올릴 듯하다. 그녀가 시도한 모든 것들은 그 자체로 누군가에게 또 다른 희망을 안겨준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모든 것을 떠나 그녀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너무나 따뜻한 감정이 절로 든다. 그녀의 작품 속에서 풀을 뜯는 젖소, 울타리를 향해 달려가는 꼬마, 마차를 타고 가는 남자, 단풍나무 시럽을 끓이는 여자 등 시끌벅적한 이 마을의 정겨운 풍경에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니 말이다.
“삶이 내게 준 것들로 나는 최고의 삶을 만들었어요. 결국 삶이란 우리 스스로 만드는 것이니까요”
– 그랜마 모지스
Ⅲ. 오직 인간을 화두로 해 온 93세 화가 <황용엽>
몇 해 전 대전의 시립미술관을 우연히 찾았다가 이동훈미술상 본상 작가 전시회가 열려서 만난 황용엽 작가의 작품들. 황용엽 화가에 대한 정보가 없었고 작품을 둘러보면서 신선했다. 최근 그려진 작품이고 독특한 자신만의 색깔이 느껴져서 그림에 집중하면서도 삶의 감정이 느껴져 젊은 작가가 대단하네 싶어졌다.
극도로 단순화된 사람의 형상과 선들 속에서 감정이 느껴졌다. 한없이 무거운 감정도 있고, 조금은 주저거리고 있는 감정도 있었다. 가파르게 내딛고 있는 감정도 있었고, 너무나 슬퍼 보이는 감정도 있었다. 그런데 화가의 출생 연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31년생이라니. 어쩌면 이렇게 창의적인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지?
전시회를 보고 난 후 황용엽 화가가 궁금해서 <삶을 그리다>라는 그의 전기를 샀다. 평양에서 태어나 평양미술학교를 입학했다가 미술학교 2학년을 다니던 중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채 남으로 내려와 다시 남한군으로 한국전에 참여했다. 살기 위해 동족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트라우마를 겪었고, 남한에서 미대를 나온 후 생계를 위해 미술학원을 운영한 적도 있지만, 그는 꾸준히 그림을 그려왔다.
그의 그림에는 오직 ‘인간’만이 있다. 자신의 트라우마를 화면에 토해내고 이를 다시 대면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인간을 화두로 삼아 계속 그려냈지만, 또 매번 조금씩 다르게 꾸준히 변화를 추구해 오면서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 왔다. 극도로 단순화된 선으로 인간을 묘사하다가, 곡선을 많이 썼다거나 흑백으로 묘사했다가 색채를 많이 사용하는 등 그의 작품 속 ‘인간’은 매 순간 변화했다. 그림은 곧 화가의 삶의 증언이라고 믿는 그이기에 그의 작품 속에 인간은 화가 자신일 듯하다. 굴곡진 아픈 역사의 고통 속에서 살아온 화가에게 ‘인간’이란 그가 풀어내야 할 숙제였고 여전히 진행형이다. 그러나 젊은 시절 선 속에 갇혀 있는 듯한 인물들이 작품 속에 있었다면, 어느새 그의 작품들 속 인물들도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화가가 세월이 흐르면서 치유되는 모습이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자신의 그림을 일기로 묘사한 황용엽 화가. 나 역시 90이 넘어서도 또렷하게 일기를 남길 수 있는 열정을 지닐 수 있었으면 하는 건 욕심일까? 그의 일기 속에 남겨진 자화상이 이제는 결코 쓸쓸해 보이지 않는 것은 그의 자화상에서 우리 얼굴들을 만나고 위로를 얻기 때문이 아닐까.
“인간성의 추구는 내 화필이 꺾이지 않는 한 결코 변할 수 없는 나의 명제다”
- 황용엽
글. 이현주 병원 마케터
이현주
글쓴이 이현주는 바른세상병원에서 홍보마케팅 총괄을 하고 있는 병원 마케터이다.병원 홍보에 진심이긴 하지만, 한 때 서점 주인이 꿈이기도 했던 글쓴이는 독서와 예술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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