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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우 건축가의 '함께 떠나고 싶은 그곳'] 답사옴니버스 — 강원 1편ARTICLE 2025. 5. 8. 22:24
1. 뮤지엄 산강원도 원주시 오크밸리 내에 뮤지엄 산이 있다. 일본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디자인하여 산 위에 지어진 미술관으로 하늘과 가까이 마주하는 곳이다. 종이와 미술을 근간으로 한 미술관으로 다양한 예술을 접할 수 있다. 산 정상에 위치한 미술관으로 향해 걸어가는 과정은 주변 경관도 훌륭할 뿐 만 아니라 마치 순례의 길처럼 마음을 정화시켜준다. 이 길에서 만나는 희고 가녀린 몸매를 지닌 자작나무들은 추운 겨울 날씨일 때 특히 창백하다. 수 공간에 다다라서 콘크리트 담장을 끼고 돌면 숨겨두었던 미술관이 모습을 드러내는데 대형 조형물이 마중을 나온 듯, 방문객들을 향해 붉게 상기된 얼굴로 환영하고 있다. 미술관 현관을 들어서면 자코메티의 거친 조각이 상징적으로 인간의 내면을 드러내 보이듯 서 있다.
이 미술관의 중심에 예리한 삼각형의 중정은 자연광을 담는 중요한 건축 요소로 연출되어 있다. 최하층 바닥에 거친 자연 석재를 깔아놓은 안도 다다오의 디자인은 나오시마의 ‘지추미술관’에서도 경험한 익숙한 공간이다. 미술관을 관통하여 후방에 가꾸어진 ‘스톤가든’으로 명명한 야외정원과 제임스 터렐 상설전시관 관람도 꼭 권장한다. 현대도시의 갖가지 소음과 스트레스에서 탈출한 하루였지만 건축 환경과 예술로 치유를 경험한다. 뮤지엄 산은 일상에 지친 자신을 되돌아보는 성찰의 장소로도 부족함이 없다.
2. 춘천 소양호
안개의 도시 춘천은 매력적인 도시다. 춘천에 갈 때마다 안개의 발원지인 소양호를 보러 간다. 소양댐 덕분에 춘천은 호반의 도시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일탈을 유혹하는 5월의 계절에 무작정 어디론가 쓩 하고 떠나고 싶을 때, 북한강을 따라 기차로 쉽게 갈 수 있는 춘천은 그래서 낭만의 도시다. 소양호의 지류인 공지천을 배경 삼아 만들어진 인근의 핫플레이스들 마다 젊은 날의 추억이 저장되어 있다.
한 번은 대학 시절, 소양호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어느 섬에 들어가서 밤낚시를 했던 적도 있다. 물이 너무 맑아서였는지 수심이 깊어서였는지 아니면 낚시 실력이 별로였는지 조과는 기대 이하였지만 그래도 친구들과 밤을 새워가며 물고기 대신 어망에 가득히 우정을 낚아왔다. 소양호에서 그렇게 보낸 젊은 날의 기억들은 소중하고 아름답다.
이번에는 우연히 속초를 다녀오는 길에 신남선착장 쪽에서 소양호반 상류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중첩되어 보이는 산은 원근감에 따라 색감을 달리하며 물속에 허리를 담그고 있다. 우리 강산의 보편적인 풍경인데도 감동을 얻는다. 어수선하게 보낸 지난 겨울을 침묵한 채 보내더니 봄을 보내고 이제는 느긋하게 여름을 기다리고 있다. 나라가 뒤숭숭하고 정치인들은 각자 자신의 신념을 앞세우며 상대를 경계하고 혐오하는데 자연은 이 또한 지나가리라 우리들의 지친 어깨를 두드리며 토닥토닥 쓰담쓰담 위로하고 격려해 준다. 평범하게 보이는 자연 속에 비범함이 숨어있다. 자연이 큰 스승이다.
3. 강릉 해변에서
강릉은 서울역에서 KTX로 2시간이면 도착한다. 발길 닿는 대로 어느 해수욕장을 방문하더라도 바다는 익숙한 풍경을 선사한다. 넓은 모래사장에는 깊게 파인 발자국들이 묘한 문양을 만든다. 반복적인 파도를 보며 무심히 해변을 걸으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른다. “지나간 자욱 위에 또 다시 밀려오며....포말로 부서지며 자꾸만 밀려오나 .” 제2회 대학가요제에서 수상을 했던 노랫말이다.해안도로에서 주변을 돌아보면 바다마을과 하늘과 파도는 잘 어우러지는 풍경으로 3중주의 하모니를 연출한다.
해수욕을 즐기며 북적이던 관광객들의 시절이 언제 있었던가. 한 겨울 비수기에 다시 찾은 바닷가는 마치 관객들이 퇴장한 객석처럼 스산하고 썰렁하다. 여름 한 철 장사를 마친 서핑보드나 파라솔 대여점은 문이 굳게 닫혀있고 드문드문 횟집과 건어물 상회들이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며 하루 종일 몇 안 되는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다. 오늘따라 을씨년스럽게 바람까지 드세니 해변은 인적이 더 뜸하다. 거센 바람이 일으킨 파도는 해안선으로 질주하여 모래사장에 닿을 무렵 거품을 토하며 쓰러진다. 인명구조를 위해 안전요원이 지키는 사다리 의자도 지난 여름, 폭염 속에서 바쁜 임무를 마치고 모래사장 위에서 바닷바람을 맞으며 긴 휴식을 취하고 있다. 분주했던 발자국들도 추억의 흔적으로 어지럽게 남아있다.
한여름, 모래 위를 맨발로 걷기 어려울 만큼 뜨겁게 달구며 작열하던 태양은 지금은 결별한 연인처럼 서늘하다. 그래도 계절이 바뀌면 다시 돌아올지도 모르니 헛된 기대라도 부여잡고 있으면 그리 섭섭하지는 않다. 바람과 파도와 해변은 서로 변하지 않는 천년의 약속을 지키며 지난 오랜 세월을 마주하고 있다. 태곳적부터 시간이 정지되어 보이는 이 곳, 철 지난 해변에 멍때리고 앉아 날 저무는 줄 모르고 있다.
해변마을을 조금 걷다 보면 도로변에서 바닷바람에 건조 중인 명태와 도루묵같은 생선류를 흔히 만날 수 있다. 바닷속을 자유롭게 헤엄치다 운 나쁘게 인간에게 포획되고 손질되어 현재는 허공을 헤엄치는 중이다. 매해 12월쯤에 속초를 방문하면 제철 생선으로 양미리와 도루묵이 중앙 어시장에 지천이다. 이 중에서 이름도 독특한 도루묵은 우리 가족이 즐겨 먹는 생선이다. 옛날 조선 14대 선조 임금이 피난길에 맛있게 먹었던 생선을 '은어'라 명명하였다가 그 이후 다시 먹어 보니 그 맛이 예전과 같지 않아서 도로 '묵'이라 명하였다는 전설이 도루묵의 어원으로 전해진다.
다른 생선들에 비해 비린내가 적어 그 맛이 담백하고 시원하다. 굵은 소금을 뿌려 연탄불에 굽거나 고춧가루와 마늘, 대파 등의 채소를 넣어 만든 찌개로도 좋지만 나는 국물을 잘박하게 조려서 만든 도루묵 조림을 특히 좋아한다. 양념이 배인 국물을 밥에 썩썩 비벼서 먹으면 밥도둑이 따로 없어 과식을 유발하기도 한다. 반찬 뿐 아니라 소주와 어울리는 술안주로도 제격이다. 알배기 도루묵 찜은 알이 굵어서 입안에서 톡톡 터지며 유별난 식감을 선사하는데 개인 기호에 따라 선호도 차이는 있지만 다른 어종에서 맛볼 수 없는 도루묵만의 매력이다. 무엇보다도 도루묵은 많이 잡혀서 그런지 가격이 저렴해서 서민 음식으로도 인기가 좋다. 기후 온난화로 바닷물의 온도가 높아지면 혹시 희귀 어종이 될까 하는 우려도 있지만 연말에도 변함없이 도루묵의 풍어를 기대한다.
4. 강릉 심곡항
강원도의 3대 미항으로 손꼽는다. 심곡항은 깊은 계곡이라는 뜻을 가진 조용한 어촌의 항구다. 심곡 바다부채길과 연결되는 아름다운 항구로서 해파랑길이다. 진입하는 헌화로는 꼬불꼬불한 도로라서 속도를 늦추고 천천히 이동하게 되는데 드라이브 코스로는 그만이다. 바다에 박힌 채 허공으로 삐죽이 얼굴을 내민 바위들은 하나같이 주상절리의 경사 주름을 가지고 있지만 모양새는 제각각이라 다이내믹한 풍경을 연출한다.긴 방파제 옆구리에는 콘크리트로 제작된 테트라포드가 서로 몸을 엮어 지탱하고 있지만 오랜 세월, 스스로 파도를 이겨내는 견고한 자연석 바위와 비교하면 조악한 인공구조물일 뿐이다. 방파제 끝에는 붉은 등대 하나가 아이콘처럼 존재한다. 초록색에 가까운 바닷물과는 보색대비를 이루고 있는 붉은 등대를 향해 긴 방파제를 뚜벅뚜벅 걸어본다. 나의 느릿한 발걸음을 한가롭게 바라보며 허공 위에서 비행 중인 갈매기조차 시간이 정지된 듯 평화롭다.
(강원 2편으로 계속....)
글/그림. 임진우 (건축가 / 정림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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