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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우 건축가의 '함께 떠나고 싶은 그곳'] 일본 중부 해안의 지역도시들volume.31 2023. 1. 31. 22:19
일본 중부 해안의 지역도시들
최근 가깝고도 먼 나라인 일본도 코로나로 인한 입국제한의 빗장이 풀려 지인들이 일본여행 소식을 전한다. 코로나가 극성을 부리기 이전에 일본의 중부 쪽 해안을 따라 가나자와를 비롯한 지역도시들을 도시와 환경을 공부하는 일행들과 함께 답사하며 돌아본 적이 있다.
우리 일행들은 나고야 공항에 내려 첫 번째 답사지인 나가하마로 이동한다. 이 마을에서는 주민 주도의 민관협력으로 거버넌스를 구축한 대표적인 도시재생의 사례를 배운다. 지역 회생을 목표로 쇠락해 가는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기존 상인들은 뜻을 모아 협력하고 지난한 과정을 겪었다. 유리공예 등, 지역상품을 특화하고 볼거리, 먹거리를 제공하여 이제는 일본을 대표하는 유리공예 관광지로 자리를 잡아 연간 200만 명의 관광객을 유치하고 회생에 성공한 스토리는 감동적이다. 가나자와로 이동하던 중 들러본 가가 시의 야마시로 온천가는 13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에도시대부터 내려오는 풍부한 온천 관련 전통문화를 계승해오고 있는 곳이다.
이번 답사여행의 주요 도시인 가나자와는 전형적인 일본의 중세도시 혹은 역사도시로 인식되는데 사찰이나 성을 중심으로 발달한 도시다. 전쟁이나 대규모 지진의 피해를 입지 않아 교토에 이어 일본의 전통건축도 잘 보존되어 있다. 거기에 더해서 신도시 개발을 병행하여 전통과 현대가 조화를 이루는 도시를 추구하고 있다. 아직 추운 날씨라 잔설이 남아있는 가나자와 성은 품격과 위엄이 있다. 인근에 일본 3대 정원으로 꼽히는 겐로쿠엔 등 중요한 문화유산이 많이 남아있어 ‘작은 교토’라 불리고 있다. 이 겐로쿠엔의 산책로도 눈이 녹지 않아서 바닥은 미끄럽지만 종종걸음으로 넓은 정원을 돌아보는 것도 색다른 즐거움이다. 이른 아침 무거운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설경을 사냥하러 나오신 사진애호가 그룹들이 눈에 띈다. 풍경이 뛰어난 넓은 호수를 중심으로 수백 년을 살아온 노송들이 저마다 카메라 앞에서 수형을 자랑한다.
가나자와에 가면 ‘누구나 즐겁게 다가서는 열린 미술관’이라는 모토를 가지고 건립된 21세기 미술관을 빼놓을 수 없다. 프리츠커상 수상작가인 SANNA 그룹의 세지마와 니시자와 류에가 설계했는데 지름 113m의 원형으로 벽면 전체가 유리벽으로 건축되어 있어 360도를 빙 돌아가며 미술품 뿐 만 아니라 도시경관을 감상할 수 있다. 건축형태와 공간, 전시방식 등, 기존의 미술관 관념을 뒤엎고 일상과 예술의 경계를 허무는 친근한 미술관이라서 시민들이 다양한 참여와 교류가 일어나고 있는 지역의 명소다.
가나자와에서 가장 큰 규모의 국가지정 역사적 찻집거리로 히가시 차야가이가 있다. 일본의 전통적인 예능과 술과 식사를 즐기는 장소지만, 에도시대에는 게이샤들이 손님을 접대했던 유흥가로 100여 채 이상의 전통목조건물들이 가로를 형성하고 있다. 일본의 전통건축 특유의 간결한 디테일과 세련된 비례감으로 만들어져 장인정신이 탁월하다. 이 레트로한 가로풍경은 잘 정비되어 관광객들도 꽤 붐빈다. 역시 국가의 ‘중요 전통적 건조물군 보존지구’로 지정되기에 충분하다. 인근 가즈에마치 차야가이 거리 역시 비슷한 풍경이지만 아사노가와 강을 바라보고 있어 저녁 무렵 산책코스로는 일품이다.
조금 더 북쪽에 위치한 항구도시인 와지마 시의 관광명소인 수산시장을 견학하고 즉석에서 이곳의 명물인 싱싱한 겨울 방어회를 안주삼아 따뜻한 사케 한 잔으로 일행과 넉넉한 인심을 나누며 아침 일찍 산책을 나온 보람을 느낀다. 고마쓰 시로 내려오는 길에 역사문화 테마파크이자 전통예술의 보전과 계승의 체험시설인 유노쿠니모리도 한 번쯤 가볼 만한 장소다. 갤러리와 공예관 등 전통공예 제작과정을 체험할 수 있는 곳으로 에도시대의 민가를 이전 복원하여 건축과 정원의 조화가 아름답다. 잘 가꾸어진 정원에는 따뜻한 겨울햇볕과 함께 여기저기 녹지 않은 잔설이 서로 다투는 듯 다정하다.
마지막으로 남측으로 내려와 일본 교토부 단고반도 동쪽 끝 ‘이네’라는 지역에 위치한 수상가옥마을인 이네노후나야(伊根の舟屋)를 답사한다. 일반적으로 동남아 지역의 필리핀이나 방콕의 수상가옥들은 나무기둥을 물속에 박고 그 위에 집을 짓는데 비해 이곳의 집들은 물과 면해 돌과 콘크리트로 기초를 만들고 집의 하부에 선실을 두어 자연스럽게 작은 배가 집안으로 진입할 수 있게 하였다. 2층 가옥에 1층을 필로티구조로 주차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남쪽으로 만을 형성하고 있어서 접해있는 바다는 파도가 유난히 잔잔하다. 후나야라고 불리는 경사지붕의 수상가옥들이 촘촘하게 군집을 이루고 있는데다 잘 보존된 일본특유의 빈티지 전통목조건축들이라 인기가 높아져 점 점 방문객들이 늘고 있는 추세이다. 이 곳은 급경사의 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바다와 산 사이의 좁은 경계를 두고 오랜 세월 동안 선형으로 길게 마을이 형성되었고 좁은 차로 하나가 동네를 연결해 준다. 물과 산, 옹기종기 마주하고 있는 어촌풍경은 그림으로 표현하기에 안성맞춤이다.
하필 여우가 시집을 간다는 변덕스러운 날씨에 답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곳은 마치 정지된 시간의 공간처럼 한적하고 느긋하다.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마을길을 따라 걷다가 당도한 찻집에 앉아보니 평화로운 수상가옥들의 풍경이 한눈에 포착되고 고즈넉한 바다마을에 시선을 빼앗긴다. 일행들도 각각 거리를 두고 대화를 멈춘 채 이 풍경에 도취되어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있다. 감동적인 풍경에 마음이 움직이는 이 시간은 모두 명상에 잠긴 듯 적요하다. 각자 질주해 온 삶의 속도를 조절하고 거칠어진 마음속을 치유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나도 역시 일상 속 재충전의 기회로 삼아 먼 수평선에 시선을 고정한 채 시간을 보내며 스케치북에 풍경을 옮겨본다. 수평선에 걸려있는 평화로운 고깃배와 하늘을 배경으로 갈매기들의 여유로운 비행조차 느림의 미학이 공존하는 곳이다.
글/그림. 임진우 (건축가 / 정림건축)
한국건축가협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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