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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주 병원 마케터가 바라본 짧고 얕은 문화이야기] 자유낙하, 떨어지면서도 두려움 없는 자유를 꿈꾸다volume.31 2023. 2. 1. 12:46
자유낙하, 떨어지면서도 두려움 없는 자유를 꿈꾸다.
<KiKi Smith, Free Fall>평범한 러시아 출신의 미국이민자가 미국뉴욕의 엘리트 사교계에 들어가 사기를 치는 애나의 이야기를 다룬 넷플릭스 <애나만들기>에서 그녀는 갤러리에서 만난 탈리아가 구매하고자 한 작품 선택을 지적하면 신디셔먼의 사진 작품 앞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느 날, 작가는 자신의 가치를 알고 더 이상 카메라 뒤에 숨지 않고 프레임 속으로 들어가죠. 남성이 지배하는 미술 사회에서 강요된 역할을 맡기보다 자신이 작품의 피사체가 되어 리드하는 역할을 택한 겁니다. 그가 세상을 바꿨어요. 이건 그냥 역할 놀이가 아니라 용기예요. 바로 미술사의 한 획이죠.”
작품 평가의 단호함에 탈리아는 그 작품을 샀고, 애나의 실력을 인정하게 된다.
<무제 필름 스틸 #17> 작품 속 여성은 신디 셔먼이지만, 특정한 흑백 영화의 배우이미지를 담고 있다. 매 순간 다양한 여성의 모습을 자신의 얼굴로 표현해 낸 신디 셔먼의 작품이 애나의 멀티 페르소나를 표현하고자 한 것이 아닐까 싶다. 다양한 페르소나로 표현된 신디 셔먼의 작품 속에 진짜 신디 셔먼은 없지만, 신디 셔먼이 아니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
이번 칼럼의 주제가 <애나만들기>나 <신디 셔먼>은 아니다. 신디 셔먼만으로 따로 이야기를 해도 충분하지만, 신디 셔먼보다 오히려 더 적극적이고 주관적인 작품의 피사체가 된 작가의 국내 전시회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한다.
애브젝트 아트로 표현된 화가, 키키 스미스
바로 신체에 대한 해체적 표현으로 현대미술계에 이름을 알린 작가 ‘키키 스미스’이다. 전시장에 들어가자마자 후각이 시각과 함께 반응했다. 작품에서 나는 향인가 싶었는데 전시회와 어울리는 조향된 향이 이번 전시에는 함께 기획되었다고. 그 전시 작품들 속에서 키키 스미스를 만날 수 있다.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사진 속 키키 스미스, 나체로 자듯이 엎드려서 웅크리고 있는 키키 스미스, 머리카락으로 만나는 키키 스미스 등.
키키 스미스(Kiki Smith)하면 따라왔던 키워드인 ‘애브젝트 아트(Abject art)’. 비천하다고도 표현되는 애브젝트는 주체도 객체도 아닌 상태로 사회나 환경에서 배제된 대상을 칭하며, 이를 예술로 만들어내는 것을 말한다. 신체의 일부, 신체의 배설물, 동물의 사체 등을 통해 복합적 감정을 경험하게 하는 것. 그 감정을 이번 전시회에서도 오롯이 만나볼 수 있었다. 물론 초기의 키키 스미스 하면 떠오르는 직접적이면서 자극적인 작품들은 많이 없었는데,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더욱 편하게 전시에 집중할 수 있기도 했다.
죽은 고양이 진저의 사체로 본을 뜬 후 한 올 한 올 털을 묘사해서 그린 <진저> 그림 속에서 진저의 눈동자는 어떤 것보다 빛나고 아름다웠다. 머리카락 한 움큼을 듬성듬성 뭉쳐서 인쇄해서 만든 작품에서, 또 가슴을 여러 컷으로 찍어 만든 작품에서 그 연속성은 역동적이고 신선하고 심지어 아름답기까지 했다. 슬프지만 아름답고 불편하지만 따뜻한 모호한 감정이 교차된다고 할까.
혀부터 항문까지 내장을 표현한 라디에이터를 연상시키는 <소화계>라는 작품은 내 몸의 일부가 저렇게 묘사될 수도 있구나라는 것을 잊을 만큼 다른 관점의 새로운 피사체로 보였다. 주철로 제작되어 연약한 내장기관과 상대적으로 더욱 대비되기도 했고. 그녀에게 이러한 작품적 표현은 억압된 사고를 전복시키고 본질에 집중하도록 하고픈 그녀의 바람이었고 그 당시 여성작가들이 표현한 전략 중 하나였다.
‘빨간 망토’가 모티브, 늑대 배를 찢고 나온 여자
전시회 중간에 전시된 청동조각들은 한동안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게 만든다. 그녀가 만든 작품 속 여성들의 몸은 아름답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에로틱함이 강조된 여성의 몸은 거기에 없었다. 지극히 평범하디 평범한 몸을 가진 머리카락이 아예 없는 여자로 묘사된 <메두사>는 그저 너무나 또렷한 눈빛으로 당당히 앞을 바라보고 서있을 뿐이었다.
<황홀>은 또 어떠한가. ‘빨간 망토’에서 할머니와 소녀를 잡아먹는 늑대이야기가 모티브가 된 늑대 배를 찢고 나오는 여자를 표현한 <황홀>에서 여자는 소녀가 아닌 성인이다. 싸움에서 이긴듯한 전사의 모습을 한 강인한 한 여성을 보면서 누구의 힘에도 의지하지 않고 우뚝 선 한 사람이 보였다.
전시의 제목이기도 한 <자유낙하>. 자신의 몸을 사진으로 찍어 적외선 필름으로 해서 동판에 옮겨 만든 이 판화작품에서 근본적 생명에 대한 고찰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낙하를 하고 있지만 너무나 평온해 보이는 저 표정. 아니 왠지 엄마의 품에 안긴 것 같기도 하고. 중력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 같은 저 안정적인 구도는 뭐지. 작품 속에서 그녀는 스스로 선택한 낙하였고, 그러했기에 자신의 선택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즐긴다. 까짓것 어차피 떨어지고 있는 것 맘껏 즐기자라고 생각하듯이. 하나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방식을 찾아 끊임없이 자신의 감성과 상상을 표출해 온 키키 스미스를 그대로 표현하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여성의 몸, 신체부터 자연과 우주를 주제로 한 작품까지
그녀가 다룬 작품들의 재료는 정말 다양했다. 판화, 조각, 사진, 드로잉, 테피스트리, 회화, 스테인드글라스 등. 이 중 종이는 조금 더 특별하다. 네팔, 일본, 앙투카 등 나라별로 각각의 다양한 종이의 특성이 도드라져 그녀만의 스케치를 담고, 그녀만의 판화와 어우러져 작품을 만들어 냈다. 이 작품들은 대단한 게 아니야, 너에게 그냥 말을 거는 것이라고 하는 것처럼 너무나 쿨하게 작은 압정만으로 벽에 고정되어 있는 것도 좋았다. 만약 액자 속에 있었다면 제대로 그 재질을 느낄 수 있었을까 싶다.
이번 전시에서는 여성의 몸, 신체가 표현된 작품들뿐 아니라 자연과 우주를 담은 작품들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이 작품들은 2000년대에 넘어오면서 특히 많아지는데, 주변 환경이 자연과 가까워지면서 자연스럽게 작품을 담는 시각도 주제도 달라졌다고 했다. 젊었을 때는 감각에 집중하고 투쟁하듯 표현하고자 했다면 이제는 주변의 것들, 자연에서도 소재거리가 보였고 자연스럽게 작품으로 연결된다고.
자연을 소재로 했어도 신화, 역사, 경험, 문화가 어우러져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보여준다. 토끼가 그래서 뭐라고 말했는데?라고 물어보고 싶고, 저 하늘의 별자리가 내 머릿속에서 돌아다니고 있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듯하다.
키키 스미스는 자신의 예술활동을 ‘정원 거닐기’라고 종종 표현했다. 여러 주제와 매체를 넘나들면서 표현해 내는데 전시회를 보고 나와서 그 앞에 모니터에서 그녀의 작품제작 과정과 인터뷰가 담긴 다큐 영상을 봤다.
“작품을 구현해 낼 때 물리적인 성질을 마주해야 하는데, 이는 자신과 세계와의 합작이며 나 혼자서는 만들 수 없는 것을 만들게 되죠. 이때 예상 밖의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지켜봐야 해요.”
작품을 구현해 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익숙한 것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야 새로운 창조적 무언가를 만날 수 있음을. 그것은 내 노력만으로 되지 않음을 인정하고 낮아져야 함을 키키 스미스가 말해주고 있는 듯했다. 여려 보이지만 너무나 또렷한 눈빛을 가진 키키 스미스는 그 작품 속에 이미 녹아 있는 듯했다.
글. 이현주 병원 마케터
이현주
글쓴이 이현주는 바른세상병원에서 홍보마케팅 총괄을 하고 있는 병원 마케터이다.병원 홍보에 진심이긴 하지만, 한 때 서점 주인이 꿈이기도 했던 글쓴이는 독서와 예술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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