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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우 건축가와 '함께 떠나고 싶은 그곳'] 순천 이야기volume.09 2021. 3. 31. 16:37
순천 이야기.
'선암사, 낙안읍성 마을'선암사
전남 순천에는 가 볼 만한 곳이 제법 많다. 전국에서 가장 선호하는 절을 나에게 하나 꼽으라면 주저 없이 순천 선암사를 든다. 특히 요즘처럼 코로나로 발이 묶인 상태에서 지리멸렬한 삶에 지쳐 어디라도 슝, 바람이라도 쐬러 다녀와야겠다는 지인이 계신다면 선암사를 가보시라고 강력히 추천하고 싶다. 전남 순천시 승주읍에 위치한 선암사는 조계산을 중심으로 유명한 송광사의 반대 측에 위치하고 있다.
선암사는 송광사보다 규모도 크지 않을 뿐 아니라 인지도 역시, 대중들에게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사찰이다. 두 건물을 상업건축으로 비유해서 말하자면 송광사는 스타필드이고 선암사는 홍대 거리쯤 되겠다. 송광사가 대규모로 집약된 거대 사찰이라면 선암사는 길과 경사에 따라 자유롭게 배치된 평범한 시골 마을 공동체의 모습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속세를 벗어나 보세요"라고 재잘대며 지저귀는 새소리가 입체음향으로 연속되며 길게 이어진 숲 속 진입로는 다른 주파수의 영역으로 전이되는 과정이다. 호흡이 거칠어지는 시점, 본격적인 사찰의 입구에 다다르기 전에 승선교가 방문객들을 맞이한다. 호기심이 많은 아이처럼 개울 물가로 쪼르르 내려가 다리의 커다란 석재 아치를 프레임으로 놓고 들여다보는 강선루의 모습은 고고 하다.. 한쪽 다리를 경사면에 깊게 내딛고 서 있는 모습에서 다른 건축물보다 신선하다. 이 누각을 경계로 하여 성(聖)과 속(俗)의 공간 개념은 뚜렷해지는 듯하다. 가을 단풍의 계절도 좋지만, 지금처럼 이른 봄에 방문한 선암사에는 은밀함과 특별한 아름다움이 숨어있다.
일주문을 통과하고 종각을 지나면 하나의 켜를 만나게 된다. 만세루가 얼굴을 보이며 이 중첩된 건축을 뒤로하면 조그마한 안마당에 두 개의 탑이 아담하게 세월을 머금고 서 있다. 두 탑은 의외로 거룩한 표정으로 서 있어 사찰의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방문자는 둘러싸인 중정에서 두 개의 탑을 바라보며 옷깃을 여민다. 이곳이 만약 대학교라면 캠퍼스 코어(Campus Core)에 해당된다. 이름 그대로 선암사에서는 아주 핵심적인 장소이다.
오밀조밀한 건축의 집합은 이 곳에서 끝나지 않고 다시 레벨을 위로하여 달마전과 산신각, 그리고 각황전과 무우전의 비틀어진 축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된다. 경사지를 잘 활용하여 길과 계단을 만들어 낸 이 배치는 마치 시골 마을을 연상하게 한다. 무리 지어 모여 있는 사찰의 건물들마다 나무들이며 이름 모를 꽃들과 화초들이 봄을 기다리고 있다. 봄소식을 가장 먼저 알리는 부지런한 전령사, 홍매화의 얼굴은 이미 붉게 상기되어있다. 연못도 여러 형식을 가지고 외부공간에 적절하게 배치되어있고 흰색의 수련 꽃이 탁한 물 위에 해탈의 모습으로 부유해있다.
선암사는 많은 건축적, 조경 요소들이 결합하여 있지만 자연스러운 배치로 잘 풀어낸 절이다. 배치뿐만 아니라 건축물들도 기교를 절제하고 투박해서 정겹다. 아무 곳이나 걸터앉아 시선을 뻗으면 새로운 경관이 만들어진다. 도시의 소음과 공해에 지쳐있는 방문객들이라면 신선한 공기와 지저귀는 새들의 노랫소리마저 시공을 초월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선암사는 일에 쫓기고 루틴 한 삶에 지친 심신을 재충전하기에는 아주 좋은 답사지라고 할 수 있다.
건축가로 살아온 나에게 현실적인 건축적 해법과 서양 중심적 건축 사고,, 건축 철학의 빈곤 등을 성찰하게 하고 자신 앞에 놓인 산적한 문제들의 홍수 속에서 너무 현실과 쉽게 타협해버린 나의 자화상을 확인시켜준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 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 정호승/ 선암사
순천 낙안읍성마을
순천 선암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낙안읍성 민속마을이 있다.
낙안읍성마을은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에 위치한 조선시대 도시계획의 고을로서 현재 읍성 내에 주민이 직접 살고 있는 대표적인 민속마을이다. 잘 보존된 초가들이 모여 있고 이웃 간에 정을 나누며 질박한 삶을 일구어 내는 전통적인 마을공동체이다. 주거 외에도 객사와 동헌, 서당까지 갖추고 있으며각종 정원수들과 오래된 고목들이 어울려 옛 정취를 간직하고 있다.
관광지에서 전시용으로 박제된 초가집은 흔하지만 실제 삶을 일구고 있는 초가집과 그 집들로 구성된 마을은 현실적으로 찾아보기 어려운데 100세대 가까운 가구가 모여 생활하고 있다니 반가운 마음이다. 동측 입구인 낙풍루로 진입하여 성곽 위로 올라 한 바퀴 산책을 시작한다. 높은 위치에서의 산책은 잔잔한 봄바람과 함께 시선은 멀리 확장된다. 성곽의 가장 높은 곳에 다다라서 뒤돌아보면 크고 작은 초가들이 옹기종기 머리를 부비며 정답게 모여 있는 형상이 우리 전통건축의 특징인 군집의 미학을 떠올리게 한다. 마을의 배경에는 높은 금전산이 병풍처럼 감싸고 동화 속 마을처럼 고즈넉하고 평화롭다. 산책 후 마을 주점에 들러 동동주와 파전을 빼놓을 수 없다. 도토리묵도 빠지면 서운하다. 출출한데 일행과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보니 취기가 오른다. 봄바람에 실려오는 온기에서 어디엔가 봄기운이 성곽마을을 소리 없이 점령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홍매화는 벌써 취했는지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있다.
산책은 길 위에서 생각을 줍는 일이다. 성곽 위 산책이야말로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가기에 충분하다. 무념무상으로 걷다 보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이 길을 타고 끝없이 연결되어 있는 듯하다. 그 연결선 상에서 나의 생애는 작은 점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니 허무함보다는 겸허함이 앞선다. 나도 이 순간은 옛사람으로 사람으로 돌아가 낙안읍성을 주제로 시조를 한 수 읊조리고 싶어 진다.
"대숲에 부는 바람에 짝을 잃었는지 산비둘기 울음소리가 구슬프다.
삼월의 바람은 아직 스산한데 홍매화는 용기 내어 얼굴을 내미는구나.
그 향기 잔잔하여 낙안읍성 나그네의 발길을 멈추게 하네.“
적어 놓고 보니 그럴듯하다.. 나이가 드니 점점 자기 자랑에 망설임이 없어진다. 아마도 지금은 동백꽃들이 피어있겠지만 순천의 봄을 먼저 알려주는 홍매화의 향기가 지역의 역사 공동체 마을,, 낙안읍성마을에 스미는 날을 고대한다.
글/그림. 임진우 (정림건축 디자인 총괄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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