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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잃지 않도록 돕는 공간을 생각하며>
3월입니다. 현장은 다시 움직이고, 병원은 분주해지며, 설계 도면 위에는 새로운 선이 그어집니다. 계절은 어김없이 바뀌고 우리는 또 하루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세계의 공기는 여전히 무겁습니다. 전쟁이 이어지고, 갈등은 확산되고, 사회 전반에는 피로와 긴장이 쌓여 있습니다.
멀리서 벌어지는 비극이 우리의 일상을 직접 멈추게 하지는 않지만, 그 불안은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우리의 심리적 안전감을 흔듭니다.
이럴 때 저는 최근 진행했던 치매 공간디자인 강의의 한 문장을 떠올려봅니다. “치매는 기억이 사라지는 병이 아니라, 기억으로 가는 길이 흐려지는 병이다. 기억은 여전히 뇌 어딘가에 존재하지만, 해마와 신경 회로의 손상으로 그 기억에 접근하는 것이 어려워진다.” 현대 신경과학 연구를 기반으로 한 이 설명은치매를 ‘상실’이 아니라 ‘길 잃음’의 문제로 바라보게 합니다.기억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접근하는 통로가 약해진 상태라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의 사회가 어쩌면 이와 닮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존엄, 배려, 공동체, 신뢰. 그 가치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곳으로 가는 길이 흐려진 것은 아닐까요.
치유 공간의 역할은 무언가를 새로 창조하는 일이 아니라 흐려진 길을 다시 또렷하게 만드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치매 환자가 익숙한 색채와 반복되는 동선을 통해 스스로 자신의 방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 것. 정신건강 환자가 과도한 자극 대신 안정된 빛과 음향 속에서 자신의 호흡을 회복하도록 돕는 것. 의료진이 소진되지 않도록 잠시라도 숨을 고를 수 있는 회복의 공간을 설계하는 것.전쟁을 우리가 멈출 수는 없습니다. 세계의 갈등을 단번에 해결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불안을 낮추는 환경은 만들 수 있습니다. 길을 잃지 않도록 돕는 구조는 설계할 수 있습니다.
최근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관객들의 공감을 얻고 있다는 소식도 들립니다. 단종이라는 비극의 시대 속에서도, 권력이 아닌 ‘곁’을 선택했던 사람의 이야기. 혼란의 시기일수록 사람들은 힘의 서사보다 인간의 서사를 찾습니다. 지배보다 관계를, 통제보다 동행을 말하는 이야기 말입니다.매거진HD가 다루는 병원과 복지 공간 역시 그 연장선 위에 있습니다. 기술은 발전하고 AI는 병원 시스템 깊숙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사람이 길을 잃지 않도록 돕는 구조’입니다.
3월은 시작의 계절입니다. 새로 짓는 것보다, 어디로 이어질 것인지 묻는 시간입니다. 치유는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동선 하나, 창 하나, 빛의 방향 하나에서 시작됩니다. 세상이 불안할수록 공간은 더 명확한 방향을 제시해야 합니다. 길이 흐려진 시대에 우리는 길을 설계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주저하지 않고 제가 가야 할 길을 또렷하게 그려가고자 합니다. 3월, 가슴을 활짝 열고 다시 한 번 길 위에 섭니다.
매거진HD 발행인
노태린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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