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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우 건축가의 '함께 떠나고 싶은 그곳'] 서촌을 걷다volume.43 2024. 2. 5. 14:07
경복궁의 서쪽마을이라서 서촌 혹은 웃대로 불리는 옥인동, 청운효자동, 필운동, 통인동 일대에는 볼거리들이 제법 많다.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 그리고 근, 현대가 어우러져 서울의 역사가 지층처럼 켜켜이 쌓여있다. 수성동 계곡을 품은 인왕산을 배경으로 오랜 세월동안 자연 지세에 맞춰 지어진 중첩된 집들의 다이나믹한 스카이라인은 어느 각도에서 바라보아도 힘차고 우람하다. 비교적 높은 곳에 자리를 잡은 배화여대에서 한눈에 바라본 여름날의 서촌풍경과 눈이 내린 아침, 청와대 일대의 풍경은 고요하고 평화롭다. 경사가 심한 동네라서 걷다보면 언덕길이 많다. 그 비탈진 골목에 오랫동안 얽히고설킨 사연들처럼 연결된 좁은 길들은 막힐 듯 이어지며 마치 풀어진 실타래 같다. 그 길을 따라 보존된 전통한옥과 현대건축이 뒤섞인 현장을 구석구석 누비는 일은 탐험가가 되어 보물지도를 가지고 찾아다니듯 흥미롭다. 이렇듯 서촌은 이야깃거리도 다양할 뿐 아니라 옛 것과 새 것이 공존하는 서울산책 코스로서 매우 의미가 있다.
통인시장
그 산책의 첫 출발지로 기다랗게 가로상가를 형성한 통인시장을 우선 둘러본다. 6·25전쟁 이후 인구가 급격히 증가함에 따라 옛 공설시장 주변으로 노점과 상점이 들어서면서 시장이 형성되고 그 이후 현대화 시설을 갖춘 곳으로 변신하여 최근 관광객들에게 핫플레이스가 되었다. 이 통인시장은 마치 종합선물세트처럼 생필품은 물론 다양한 먹거리도 풍요롭다. 2012년부터 '도시락카페 통(通)'을 운영하여 큰 호응을 얻고 있는데 청소년들과 관광객들이 엽전으로 환전하여 도시락에 순대와 빈대떡, 김밥을 담고 있는 장면이 이채롭다. 특히 이 시장의 기름 떡볶이는 참새의 방앗간처럼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명소이니 잊지 말자. 천창을 설치하여 비오는 날의 편의를 도모했지만 아직도 전통재래시장의 분위기가 남아있어서 정겨운 유년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통인시장 옆 한옥골목
통인시장이 세로축이라면 가로축으로 몇 개의 골목들이 연결되는데 이 곳에 남아있는 옛 한옥들이 정겹다. 이 골목으로도 시장진입이 가능하다. 오래된 한옥건물들과 낡은 대문, 담벼락들이 옛 서울의 정취와 낭만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문을 연 상점들은 구경나온 손님들을 맞이하면서 시장골목은 이내 활력이 넘치고 북적이기 시작한다. 서로 돕고 사는 이웃의 정이 남아 인정이 모락모락 솟아나는 곳. 어머니의 손맛으로 만들어 낸 먹거리들과 넉넉한 인심이 묻어나는 곳으로 좁은 골목길과 시장은 하루하루 소박하고 정직한 삶의 체험 현장이다.
필운동 선인재 골목길
서촌에는 유달리 분위기 좋은 맛집들이 많다. 속칭, 식탐줌마들이 선호하는 가성비 좋은 한식집밥을 만날 수 있는 선인재라는 한옥식당이 그 중 한 곳이다. 게스트하우스로도 운영되고 있다니 이 좁은 골목에 눈이 내리는 날, 눈 위에 발자국을 찍으며 한 번 쯤 방문해보는 것도 좋겠다. 가스배관, 전신주, 낡은 선홈통, 서까래도 친근하지만 올망졸망 대문밖에 내놓은 화분들이 정겹다.
옥인빌라 옆 불국사
불국사는 경주에만 있다는 선입관은 버려야 한다. 인왕산 아래 옥인5길과 필운대로9길이 만나는 언덕배기에 위치한 이 곳 불국사는 소박한 사찰이다. 수성동 계곡을 지나 인왕산 7부 능선 쯤 에는 석굴암도 있다고 한다. 오래전부터 절 주변에 심어놓은 대나무 숲에 아직은 찬바람이 불고 불자는 동안거를 마치고 봄을 기다린다.
홍건익 가옥
홍건익에 의해 1934~1936년에 건립된 한옥으로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서울시에서 매입 후 전통공방, 역사가옥, 문화시설 등으로 운영 중이다. 건물은 대문채, 행랑채, 사랑채, 안채, 별채와 일각문, 우물, 후원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레벨이 있는 자연지형을 자연스럽게 이용한 각 건물들의 배치와 기본구조, 한옥의 디테일이 뛰어나다. 봄볕이 나른한 안채의 툇마루가 방문객들에게 잠시 쉬어가라고 손짓한다. 정원에 붉은 연산홍이 기지개를 켜고 있다.
배화여고 본관
1926년 12월생이다. 붉은 벽돌과 박공지붕의 규범적인 비례로 이루어진 고전양식의 건축물로 건립자인 조세핀 캠벨여사의 이름은 따서 ‘캠벨기념관’으로도 부른다. 현재는 수리 후 도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도 항일정신으로 버텨내며 학생들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시킨 자랑스러운 건물이다. 한 세기 가까운 세월을 지켜낸 배화의 언덕, 본관 주변에는 흐드러지게 봄꽃이 화사하고 사방은 온통 나른한 봄기운이 가득하다.
옥인연립
수성동 계곡은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에 배경이 된 조선시대 선비들의 휴양지였다. 이 곳에 지어진 서민아파트는 다행히 철거되어 옛 언덕의 모습이 복원되어 있다. 아파트 철거 후, 옥인연립은 수성동 계곡과 가장 가까운 주거지가 되었다. 40년이 넘은 노후빌라 임에도 불구하고 3층 저밀도에 공기 좋고 풍광이 아름다워서 최근에는 젊은 세대에게도 인기가 좋다. 세련된 감각의 인테리어 디자인으로 리모델링한 사진들을 쉽게 검색할 수 있다. 인왕산의 끝자락과 인접해있어 자연친화적인 외부공간이 많아 계단을 오르면 산책하기 좋은 장소들이 많다. 연두색 나뭇잎이 푸르고 신록의 계절이 도래하고 있다.
청운동 벽산빌리지
부암동 고개를 넘어 창의문을 등지면 남산 서울타워와 함께 서촌풍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청운공원 앞에서 바라다 본 풍경은 붉은 스패니쉬 기와지붕의 중첩과 원거리의 고층빌딩이 중첩되면서 묘한 콘트라스트를 이룬다. 적벽돌로 잘 지어진 건물들인데 고급주거단지라서 그런지 높은 담장과 압도적인 표정의 대문들이 폐쇄적이다. 빌라단지 내, 도로를 걷다보면 왠지 친근감은 사라지고 이방인같은 느낌이 든다.
경기상고 앞 자하문로
점차 날씨는 더워지고 가로수 그늘이 좋아진다. 자하문터널을 지나 자하문로를 걸어 내려오면 경기상업고등학교가 좌측에 위치한다. 옛날에는 백운동천 물길이 지나던 곳이라는데 걷다보면 굽이굽이 깊은 물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여름을 맞아 의기양양 가로수로 서있는 은행나무 잎이 푸르다.
경기상고 교정
청운동에 위치하고 1923년에 설립된 전통 실업명문 고등학교다. 오래된 학교라서 굵은 소나무밭과 아름드리나무들이 제법 많다. 백악산을 배경으로 교정에는 시나브로 가을이 도래하고 있다. 시끌벅적하던 운동장도 요즘은 한가하다. 텅 빈 운동장 스탠드 한구석에 앉아있는 커플은 자신들의 청소년 시절을 추억하고 있는 중일지도 모르겠다.
신교동 계단
옥인동 언덕동네로 가기위한 관문으로 신교동 80계단이 있다. 게릴라성 호우가 잦은 요즘처럼 갑자기 소낙비가 쏟아지면 대략난감이다. 다행히 준비한 우산을 써도 심술 맞은 비는 바짓가랑이를 다 적신다. 소나기가 내리는 날, 이런 가파른 계단을 오르는 일은 성가시지만 이런 날은 계단위에서 나를 반갑게 기다려주는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엉뚱한 기대를 해본다.
누상동
서촌을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윤동주 시인이다. 그가 하숙을 하며 지냈던 곳이 누상동이다. 그 때 이 후로 다세대 주택들이 많이 들어섰겠지만 전봇대와 전선줄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사이로 좁다란 하늘이 보이는 누상동 골목은 인상적이다. 민족시인 윤동주는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의 고뇌와 자화상을 고백으로 표출하며 감성적인 시를 집필했는데 윤동주 언덕과 윤동주 문학관이 부암동 창의문 인근에 위치해있다.
서촌지역은 조선시대 겸재 정선과 추사 김정희 같은 예술가들이 살았던 마을이다. 그 이 후에도 노천명, 윤동주, 이상 같은 문인들을 비롯하여 이중섭, 이상범, 박노수 같은 굵직한 화가들을 배출했다. 서촌의 오래된 골목을 산책하며 이 땅에 흔적을 남기고 떠난 수많은 예술가들을 찾아보는 과거로의 시간여행은 흥미롭다. 그리고 조선과 일제강점기를 거쳐 켜켜이 쌓여있는 서울의 근 현대사를 찾아 떠나는 역사여행도 의미가 있다. 이렇게 재미와 의미가 뒤섞인 장소인 서촌은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음미하며 산책하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 그동안 우리가 분주하게 사느라 지나쳤던 도시에서 소중한 것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서울의 숨겨진 아름다움은 이렇게 곳곳에 보석처럼 존재한다. 다만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할 뿐.....
글/그림. 임진우 (건축가 / 정림건축)
한국건축가협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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