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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우 건축가의 '함께 떠나고 싶은 그곳'] 동화 속 풍경, 스위스 취리히와 바젤volume.42 2024. 1. 4. 09:55
2024년 새해가 밝았다. 겨울에 어울리는 도시는 어디일까?
눈의 고장 일본 홋카이도와 스위스 정도면 딱 좋을 것 같다. 설국여행은 이미 연재했으니 스위스로 떠나보자.
취리히같은 유럽의 오래된 도시와 건축은 이방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시간이 축적되어 보이는 빈티지한 건축물들이 즐비한 리마트 강가에 도열해있는 오래된 가로수들이 머리를 숙이고 도시산책의 발걸음을 유인한다. 더구나 깊은 가을을 맞아 퇴색한 색상의 나무들은 오랜 도시와 잘 어울린다. 이 도시는 르네상스와 로마네스크 양식이 섞인 건축들로 주거시설, 상업시설과 함께 높은 첨탑을 가진 교회들도 조화를 이루며 시선을 바꿀 때마다 방문객들에게 한 폭의 풍경화를 선물한다. 특히 리마트 강 너머에 고풍스러운 그로스뮌스터 교회의 쌍동이 종탑이 수직적인 모티브로 랜드마크 역할을 해준다.
저층의 밀도로 구성된 도시지만 고전적인 비례감이 뛰어난 창문을 가진 작은 건축물 하나하나에도 세월이 축적되어 있다. 특히 뻐꾸기창이 있는 지붕을 가진 건축물이 많은데 저 경사 지붕 속 다락방같이 낮은 천장고를 가진 방 안의 아늑한 침대위에서 창문으로 바라보는 강변의 도시전망은 어떨까를 상상해본다. 함박눈이 내리면 동화 속 꿈나라의 세계로 변신할 것 같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이 풍경을 해치지 않고 서로 조화하는 건축물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져있다. 몰개성한 아파트와 고층빌딩이 뒤섞이며 즉흥적으로 만들어진 서울의 경관과 비교된다. 600년 넘은 우리 도시의 경관과 잠재력은 어디로 실종되었는가.
낮의 길이가 유독 짧아서인지 이른 저녁시간인데도 해는 낙조를 서두르고 있다. 하늘에 붉은 수채화 물감이 번지며 노을의 색상이 강해진다. 이윽고 기온은 뚝 떨어져서 따뜻한 장소를 찾다가 강가의 전망 좋은 카페를 찾았다. 전망이 넓은 유리창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향이 짙은 따뜻한 커피를 주문한다. 저무는 강변에 불빛이 하나 둘 켜지는 모습들을 감상하며 오늘 하루의 고단함을 달래본다. 창밖으로 팔짱을 낀 커플이 멜로영화의 주인공처럼 유유히 걷고 있다. 역사가 묻어나는 강변의 다리위에도 사람들이 모여들어 몽환적인 풍경을 만들고 있다. 저물어가는 이국적 풍경에 취해 차 한 잔의 여유를 즐겨보려고 하지만 객창한등(客窓寒燈)... 출장 중인 나그네는 여전히 고독하다. 어두운 강물에 비친 불빛이 흔들린다. 내 마음도 덩달아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
취리히에서 바젤까지는 차로 약 2시간 정도 소요된다. 스위스 바젤 국경 인근 독일지역에 '비트라 캠퍼스'가 위치하고 있다. 스위스의 유명한 가구전문 제작회사인 '비트라 인터내셔널'이 운영하는 이 곳은 디자인한 가구의 제작과 출시에 필요한 공장들과 부대시설을 잘 조성해놓았다. 특이한 점은 니콜라스 그림쇼를 비롯한 프랭크 게리, 자하 하디드, 알바로 시저, 렌쪼 피아노, 안도 다다오, 세지마 등 세계 유명 건축가들을 초청하여 그들의 작품들로 1981년부터 지금까지 약 40년 가까이 20여개의 시설을 구성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대가들의 다양한 건축 작품 박람회장 혹은 전시장과 다름없으며 방문객들은 한 장소에서 눈 호강을 하기에 충분하다. 이 중에서 몇 가지만 임의로 선택하여 방문소감을 적어본다.
비트라 하우스, 헤르조그와 드뫼롱/2010
이 많은 작품들 중에서 편익시설과 전시장을 겸한 '비트라하우스'가 제일 먼저 방문객을 맞이한다. 스위스 건축가인 헤르조그와 드뫼롱의 작품으로 박공지붕면체 여러 개를 각도를 달리하여 쌓아 놓은 모습인데 전체 층 수도 헤아리기 어려워 건축적 호기심을 자극할 뿐 만 아니라 매우 유니크하다. 하늘을 배경으로 뻗어나간 조형은 역동적인 느낌을 준다. 전시동선은 미로를 따라 탐험하듯 짜여 있다. 크고 작은 계단들을 경험하며 층을 오르다보면 다양한 각도가 중첩되며 공간감은 신선하다.
건축과 인테리어, 산업 디자인의 가구와 소품까지 잘 융합되어 얼핏 보면 자유롭고 랜덤하게 쌓아놓은 조형처럼 보이지만 전시동선과 내부 공간 구성에 있어 방문객들에게 공간적 감동을 전달하기 위해 건축가의 치밀한 계산이 엿보이는 창의적이고 흥미로운 건축이다.
컨퍼런스 파빌리온, 안도 다다오/1993
안도 다다오의 건축은 침묵이며 미니멀한 감성적 시어로 채워져 있다. 외부의 다른 건축과 철저히 격리되기를 바랐는지, 노출 콘크리트 담장으로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었다. 그 차가운 물성의 벽을 따라 자신만의 건축세계로 접근하게 하는 의도적인 외부 동선계획이다. 진입하는 방문객은 순례와 명상을 떠올리게 된다. 이윽고 좁고 긴 현관문에 이르면 콘크리트 벽과 대조적인 따뜻한 목재마감의 바닥이 감미롭다. 내부공간은 곡선과 직선이 기하학적으로 교차하며 선큰가든과 함께 빛이 가득한 지하공간으로 연결된다.
기존 대지에 심어져 있던 많은 벚나무들을 훼손하지 않으려고 건축을 배치함에 섬세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려져야 했던 세 그루의 벚나무를 추모하듯 세 개의 이파리를 콘크리트 담장 벽에 새겨놓았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봄날, 이 장소를 다시 찾고 싶어진다.
비트라 디자인뮤지엄, 프랭크 게리/1989
건축의 중력을 없애고 비 물질화시킨 프랭크 게리 특유의 해학과 재치가 돋보인다. 따라서 이웃한 안도 다다오의 절제된 건축과는 강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그의 건축은 추상화된 덩어리들이 춤을 추듯 자유롭다. 곡면을 이용한 계단, 중첩된 조형사이로 끌어들인 빛, 비틀어지고 경사진 천장....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시공간은 자신의 기능을 잘 수용하며 외부 조형과 한 몸을 이루고 있어 건축의 기본적인 규범에 충실하다. 넓은 캠퍼스에서 비교적 작은 규모의 디자인 뮤지엄이지만 조형성이 뿜어내는 아우라에 의해 강한 존재감을 갖기에 충분하다
비트라 소방서, 자하 하디드/1993
동대문디자인플라자를 디자인한 자하 하디드의 첫 작품이다. 마치 가위로 오린 종이조각을 재구성하듯 노출콘크리트 판을 잘라 자유자재로 기울이고 틀고 하여 완성된 건축이다. 모든 공간은 멀미가 날 정도로 어지럽게 사선으로 기울어지며 기하학적으로 재구성했다. 초현실적인 공간의 실현이지만 결국 실용성에 문제가 되어 3년 정도 후에는 소방서의 기능을 상실한 채 존치되어있다. 페이퍼 아키텍트의 초기작으로서 건축의 합목적성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작업이다.
겨울을 예고하는 계절의 오후, 첫 눈이 내리는 날에 답사한 비트라 캠퍼스에는 마치 산타할아버지의 종합선물 세트처럼 프리츠커 상의 반열에 오른 내로라하는 건축가들의 개성 넘치는 작품들이 우리 일행들을 반겨주고 있었다. 넓은 정원은 흰 캔버스가 되고 방문객들의 발자국들이 찍히며 시간의 중첩을 만들어 간다. 이 눈이 함박눈이 되어 순백의 캠퍼스로 변신하면 건축의 현실과 판타지가 경계를 허무는 순간이 될 것이다. 탁월한 건축가들의 작품 속에서 건축의 본질과 실마리를 찾아보려했지만 결과적으로 초라한 나의 실존을 발견했을 뿐이다. 어느 시인의 예고처럼 끝에서 다시 시작해야하는 것일까? 그렇게 이 여정에서의 마지막 밤은 이방인의 마음을 들뜨게 해놓고 무심히 깊어만 간다.
"언제나 끝에서 시작한다.
지금 여기가 맨 끝이다.
나무 땅 물 바람 햇빛도
기억 그리움 고독 절망 눈물 분노도
꿈 희망 공감 연민 연대도 사랑도
역사 시대 문명 진화 지구 우주도
지금 여기가 맨 앞이다.
지금 여기 내가 정면이다."
------- 이문재 시 중에서.
글/그림. 임진우 (건축가 / 정림건축)
한국건축가협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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