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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주 병원 마케터가 바라본 짧고 얕은 문화이야기] 담뱃갑 은박지에 새긴 뜨겁고 애잔한 사랑의 기록volume.27 2022. 10. 6. 16:12
[MMCA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이중섭]
“…끝없이 훌륭하고... 끝없이 다정하고…
나만의 아름답고 상냥한 천사여…
더욱더 힘을 내서 더욱더 건강하게 지내줘요.
화공 이중섭은 반드시 가장 사랑하는 현처 남덕씨를 행복한 천사로 하여
드높고 아름답고 끝없이 넓게 이 세상에 돋을새김해 보이겠어요. 자신만만 자신만만…”
MMCA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인 이중섭 전이 열렸다는 소식을 접하고 일주일이 지나 전시회를 다녀왔다.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된 이건희 컬렉션 작품 중 이중섭 작품 80여 점과 미술관 소장품 10점을 합친 90여 점이 전시된 것이다. 전시장에 들어서서 작품들을 하나하나 보다가 결국 이중섭이 일본에 있는 부인에게 보낸 편지화 앞에서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갑자기 너무 서럽게 눈물이 나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다 싶었다. 흰소, 황소, 아이와 게, 물고기 등을 소재로 한 작품에 대한 감탄을 떠나 인간 이중섭의 행적을 따라 구성한 전시에서 인간 이중섭이 보였다. 한 걸음 한 걸음 발걸음을 옮기면 그의 작품보다 그림을 그리고 있던 그 시기의 그가 보인 것이다.
그 작품 속의 이중섭이 말하고 있었다. “내 바람은 오직 하나야. 가족들과 함께하는 것.”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과 함께 생을 누릴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 작품들에서 그 감정이 오롯이 느껴졌기에 애잔했다. 전시를 보고 난 며칠 후 아내인 야마모토 마사코의 별세 소식을 들었다. 한국 이름 이남덕, 남쪽에서 온 덕 있는 여자란 뜻의 이중섭이 지어준 이름을 가진 그녀가 그의 곁으로 간 것이다. 101년을 살았던 그녀의 삶 중 이중섭과 함께 한 시간은 단 7년. 그 7년의 추억을 가지고 두 아이와 함께 나머지 시간을 버텨온 그녀였다.
그런 그녀와 이중섭이 만난 곳은 일본의 미술학교인 문화학원이었다. 요즘 흔히 말하는 금수저로 태어난 이중섭. 평안남도에서 부농이자 지주인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지만, 외조부가 초대상공회의소 회장을 역임할 정도로 부유한 외가로 인해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원산으로 이주해 살다가 평양 종로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오산학교로 진학했다가 거기서 미술의 재능을 발견하고 1935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데이코쿠미술학교에 진학, 중퇴 후 도쿄 문화학원에 입학한다. 사실 일제강점기에 부를 가진 이들이 모두 친일파일 수는 없지만, 일본유학까지 갈 정도의 재력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 자체가 불편하기도 했다. 애국운동을 한 사람들이 넉넉지 못한 삶을 살았던 시기였기에. 그런데 그에게 사상이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싶기도 하다.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듯 그는 그림에 집중했고, 제대로 배우기 위해 일본을 찾았을 뿐이리라.
연인 야마모토 마사코에게 보낸 <엽서화>
운명처럼 서로에 끌려 연애를 한 둘의 모습이 이중섭의 작품들에서도 볼 수 있다. <상상의 동물과 여인>, <여인> 등 마사코를 모델로 한 작품들도 많이 볼 수 있는데, 그에게 있어 그녀는 뮤즈와 마찬가지인 존재였다. 이중섭과 마사코는 서로 아고리(턱이 긴 이씨라는 의미)와 유비군(발가락 군이란 의미)을 애칭으로 부르며 연애했고, 이 시절 마사코의 다친 발을 치료해준 에피소드가 담긴 작품도 만날 수 있다. 특히 그녀와의 연애시기에 보낸 ‘엽서화’들을 이번 전시에서 많이 볼 수 있었다.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던 시기에 조선인 남성과 일본인 여성이 사귀는 게 쉬웠을까 싶은데, 두 사람은 사랑으로 모든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마사코의 부모님도 두 사람의 교제를 반대하지 않고 딸의 선택을 믿어주었다고 한다. 둘은 그렇게 결혼을 약속하고 사랑했지만, 이중섭은 1943년에 전람회 준비를 하면서 잠시 귀국했다가 돌아가지 못하고 원산에 남게 되었다. (이중섭의 일대기에서 태평양전쟁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총후화가가 되었던 암울한 역사적 기록이 남아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다가 가족의 결혼 승낙을 받고 마사코에게 조선에서 결혼을 하자고 전보를 보냈고, 전쟁 시기에 지금이 아니면 서로 만나지 못할 것을 직감한 마사코는 1945년에 태평양전쟁 막판으로 일본인들이 조선을 빠져나가는 시기에 반대로 조선에 목숨을 걸고 배를 타고 부산으로 들어왔고 서울을 거쳐 원산으로 갔다.
일본에 있다면 안전했을 그녀는 위험한 시기임에도 오로지 이중섭만을 바라보며 조선 땅을 밟은 것이다. 말도 잘 통하지 않고 일본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반대로 차별을 받을 수 있음에도 그녀는 사랑 하나만으로 자신의 삶을 선택한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이중섭은 이남덕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고, 그렇게 둘은 결혼식을 올렸다.
1945년에 결혼한 후 원산에서의 생활을 이남덕은 축복이었다고 표현했다. 그렇지만 시댁 식구들에게 모두 사랑받고 행복했던 시기는 그리 길지 않았다.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서고 형이 자본가 계층으로 몰려 수난을 당하다가 6.25 전쟁이 발발하고 중공군이 개입하자 이중섭은 가족들을 데리고 부산으로 피난을 내려왔다. 이때 그의 작품 대부분을 원산에 남은 노모에게 맡기고 와서 그 작품들은 현재 볼 수 없다.
은박지에 윤곽선을 눌러 그리고 물감 등으로 색을 도드라지게 한 <은지화>
아무것도 없이 오일 팔레트 하나만 들고 부산으로 피난을 내려온 그는 막일이 익숙하지 않아 돈을 잘 벌지도 못 했다. 대신, 이남덕이 재봉질하면서 가족들의 생계를 꾸렸다고 한다. 그렇게 버티다가 다시 1951년에 제주도로 피난을 갔다. 거기서 그는 좁은 방에서 아들 2명과 힘들게 살았지만, 가족들과 함께 있어 행복했던 시기였다. 그의 작품 중 ‘가족과 첫눈’도 제주도에서 겪었던 즐거움을 묘사한 작품이다.
또한 그의 작품 속 소재로 등장하는 물고기와 게, 그리고 어린이가 등장하게 된 시기이기도 하다. 게를 많이 잡아먹어 미안해서 게를 그려준다고 말했다고 하는데, 그 시기의 경험들이 그가 죽기 전까지 그린 작품들의 모티브가 되었다.
1951년 말 전쟁에 곧 끝날지도 모른다는 소식에 12월에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고 형편은 계속 어려웠다. 그러다가 장인어른의 별세 소식을 접하고 부인도 폐결핵으로 몸 상태가 좋지 않자 아이들과 부인을 일본으로 보냈다. 그 당시 한일 간의 국교가 단절되어 있어 이중섭은 함께 하지 못했고, 잠깐의 이별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렇게 가족을 떠나보낸 후 그는 가족들을 만나려고 열심히 돈을 모으기 위해 일을 했지만,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 당시 그리기 시작했던 것이 바로 담배를 포장하는 알루미늄 속지에 꾹꾹 눌러 그림을 그려 상감기법을 연상케 작품화한 은지화이다. 그릴 종이가 없고 물감을 사기도 쉽지 않자 그가 찾아낸 방법이었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보기 힘든 이 은지화를 감상할 수 있었다. 조명을 낮춰 더욱 작품이 잘 보이게 만들었는데, 세밀하게 선으로 묘사한 작품들 하나하나에 절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가족을 향한 절절한 그리움이 담겨 있어서 작품 하나하나 눈을 떼기 쉽지 않았다.
1953년 7월, 시인 구상의 도움으로 이중섭은 일주일간 선원증을 구해 일본으로 갈 수 있었고, 장모가 신원보증서를 구해주어 일주일간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었다. 이중섭은 더 머물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계속 있을 수 없었고, 그렇게 히로시마 여관방에서 가족들과 보낸 시간이 마지막이 될지는 그때 알지 못했다. 다만 이때 아내에게 큰 그림을 그린 은지화 70여 점을 전달했다고 한다.
일본에 있는 아내와 아들을 그리워하며 보낸 편지 속 그림 <편지화>
한국에 돌아와서 그는 돈을 벌기 위해 노동일을 하는 한편, 꾸준히 그림도 그렸다. 오로지 가족들을 만날 생각 하나뿐이었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을 꾹꾹 눌러 담은 편지들을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었는데, 그 절절함에 가슴이 아렸다. 이때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아이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 벗은 아이를 그렸다는 이유로 춘화로 취급되어서 전시되었던 그림이 철거되는 상황을 겪기도 했다.
그 시기 그렸던 작품인 ‘현해탄’도 이번 전시회에서 볼 수 있었다. 현해탄 너머에 아내와 가족이 있고, 작가는 작은 쪽배를 타고 가족들을 만나러 가겠다는 의지가 담긴 작품이다. 그렇게 작품들을 그리면서 1955년에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개인전을 열기도 했지만, 전시회의 성공에 비해 작품 판매대금을 받기는 쉽지 않았고, 그 과정에서 생활고를 겪었다. 서울에서 마지막 시기에 그린 작품인 ‘정릉 풍경’에서는 쓸쓸함이 너무나 또렷하게 드러난다. 정신적으로 힘들어져 극도로 몸이 쇠약해지면서 영양실조와 간경화, 정신병 등이 겹쳐 서울적십자병원에서 무연고자로 사망했다. 그때 그의 나이가 40세였다.
내 나이가 되어보니 그는 너무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작품들이 유명해지는 것을 지켜보지도 못하고, 자식들이 커가는 것도 보지 못한 채 그렇게 떠나갔다. 시대를 잘못 만난 천재화가이자 국민화가로 불리지만 그 표현만으로 그의 삶을 다 담을 수 없을 듯하다. 그가 떠난 후에도 여전히 살아나간 그의 아내와 아들들이 잘되었더라면 하는 건 아마 그의 삶을 지켜본 이들 누구나 두 손 모아 기도했던 부분일 듯하다.
이중섭의 그림이 담긴 편지 중 상당 부분을 전시를 이유로 한국의 친척에게 전달했는데 다시 돌려받지 못했다는 내용을 예전에 아내의 인터뷰로 본 적이 있다. 거기다가 그의 아들이 위작 논란에 연루되어 한때 이슈가 되었던 것도 기억이 나 너무나 안타까웠다.
그렇지만 그녀는 한결같이 그 자리를 지켰다. 이중섭이 엽서를 보내고 편지를 보냈던 그 주소에서 그렇게 이중섭을 생각하며 계속 살았고, 이제 그를 만나러 떠났다. 이중섭이 재회를 꿈꾸며 암탉과 수탉이 입을 맞추는 모습을 그렸던 ‘부부’ 작품처럼.
글/사진. 이현주 병원 마케터
이현주
글쓴이 이현주는 바른세상병원에서 홍보마케팅 총괄을 하고 있는 병원 마케터이다.병원 홍보에 진심이긴 하지만, 한때 서점 주인이 꿈이기도 했던 글쓴이는 독서와 예술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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