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지혜 팀장의 병원디자인 라운딩] 덜어낼때 가장 중요한 것이 보인다ARTICLE 2026. 8. 3. 12:55
덜어낼때 가장 중요한 것이 보인다.
그 많은 게시물은 모두 읽힐까.병원은 방문객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참 많은 공간이다. 환자 안전을 위한 주의 사항부터 미로 같은 병원에서 길잡이가 되어 줄 각종 검사실의 위치 안내, 병원의 우수성을 알리는 홍보물, 방문객들의 다양한 질문에 대비한 답까지. 이러한 정보들은 포스터와 사인, 리플렛의 형태로 병원 곳곳을 채우고, 혹은 문자와 카톡으로도 전송된다. 해서 외래와 병동, 로비는 물론 벽과 바닥, 천장 심지어 화장실 문까지 빈틈없이 각종 안내문이 붙어 있는 풍경은 이제 병원의 일상이 되었다.
내가 일하고 있는 공간디자인팀의 주요한 업무 중 하나 역시 이러한 게시물과 사인, 각종 인쇄물을 디자인하고 제작 · 설치하는 것이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질문을 하게 되었다.
‘이 많은 정보는 과연 누구에게 얼마나 잘 전달되고 있을까?’
병원에서 근무하며 여러 의료기관을 방문하고 같은 업무를 하고 실무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이는 비단 내가 몸담은 병원만의 상황도 아니고 나만의 의문과 고민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병원은 대부분의 사람이 긴장과 불안 속에서 방문하는 공간이다. 신체적으로 취약한 상태에서 익숙하지 않은 의료 용어와 복잡한 동선, 낯선 검사 과정 속 스트레스는 환자와 보호자들의 정보 처리 능력과 인지 능력을 평소보다 현저히 떨어뜨린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전달하려는 정보를 계속 더하는 것이 과연 환자 경험에 최선의 해결책일까.
낙상사고가 발생했다고 안내문을 하나 더 붙이고, 병원 앱 이용률이 낮다고 홍보물을 추가하고, 길을 묻는 환자가 많다고 안내 사인을 계속 늘린다고 해서 문제가 반드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보가 많아질수록 정말 중요한 정보는 눈에 띄지 않게 되고, 사용자는 더 큰 혼란을 겪게 된다.
그래서 관련 업무 요청을 받았을 때는 무엇을 더 할지보다 무엇을 덜어낼지를 더 오래 고민하게 된다. 모든 정보가 다 각 부서로서는 필요한 내용일 것이다. 그러나 모든 정보를 똑같이 강조하면 결국 아무것도 강조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미 공간에 게시되어 있는 정보까지 함께 고려해 정보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그에 맞는 시각적 위계와 전달 방식을 설계한다. 사용자가 가장 필요한 순간에 가장 필요한 정보를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외래(이비인후과·심장병원) 게시물 간소화 프로젝트 적용 전후. 정보의 우선순위를 재정리하고 게시물을 줄여 가독성을 높였다. 
외래(이비인후과·심장병원) 게시물 간소화 프로젝트 적용 전후. 정보의 우선순위를 재정리하고 게시물을 줄여 가독성을 높였다. 이는 인지심리학의 원리와도 맞닿아 있다. 사람의 뇌는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이 제한되어 있으며(인지 부하), 모든 정보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정보만 선택적으로 인식한다(선택적 주의). 또한 선택지가 많아질수록 판단과 의사 결정은 더 어려워진다(선택 과부하).
병원 공간에서도 이러한 원리는 그대로 적용된다. 모든 안내문을 게시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정말 필요한 정보만 적절한 위치와 방식으로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 안내가 많을수록 길을 더 쉽게 찾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인의 위치와 배치 방식이 길 찾기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 모든 안내를 크게 강조하면 결국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고, 불필요한 정보가 많아질수록 핵심 정보는 묻힌다.
환자를 중심에 둔 시각 정보디자인은 정보를 많이 전달하는 디자인이 아니라, 사용자가 가장 필요한 정보를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드는 디자인이다. 어쩌면 덜어내는 일은 디자인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을 드러내기 위한 또 다른 디자인인지도 모른다.

병동에 게시된 안전관련 안내문의 간소화 적용 전후. 불필요한 안내를 정리하고 시각적 위계를 개선해 핵심 정보가 쉽게 인식되도록 했다. '
글. 김지혜 팀장 (울산대학교병원 공간디자인팀)

김지혜 팀장
- 울산대학교병원, 공간디자인팀 팀장 (2020-현재)
- 울산과학기술원, 과학문화융합 전시 컨텐츠 개발 연구원 (2018-2020)
- Solidlight, INC. Experience Designer (2013-2017)
- The Philadelphia Zoo Exhibit Design Intern (2012)
- Fireman's Hall Museum Exhibit Design Intern (2011)
AWARD & HONORS
- 부산국제디자인어워드 심사위원 (2026)
- 국제과학관심포지엄, 우수논문상 (2019)
'ARTICLE' 카테고리의 다른 글
[BOOK 신간소개] 헬스케어 비즈니스의 법칙 (0) 2026.08.03 [송창민 푸드애널리스트의 건강한 맛집] 르한스 (0) 2026.08.03 [의사가 들려주는 병원경영 이야기] 세계의 노인병원 (0) 2026.08.03 [NEWS] 2026학년도 상호협력 협약 (MOU) 체결 (0) 2026.08.03 [임진우 건축가의 '함께 떠나고 싶은 그곳'] 사라진 풍경 (1) 2026.07.07 [양재혁의 바이오Talk 헬스Talk] 환자는 신약개발의 동반자인가? (0) 2026.07.06 [정재훈 대표의 치과 경영 솔루션] 매출은 늘었는데, 통장은 왜 줄었을까 (0) 2026.07.03 첨단 기술과 인간 중심의 공간 철학 담은 동탄시티병원 (하) (0) 2026.07.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