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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심과 자부심으로 의료계 발전에 힘써온 노만희 원장 (하)volume.46 2024. 5. 2. 18:38
의료계 대표들 의견 제대로 청취하는 기구 조성해
의사들이 마음 편히 진료할 수 있는 세상, 정책 만들어야!노만희정신건강의학과의원은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정면에 보이는 큰 창이 내부 공간을 환하게 밝히며 쾌적한 개방감을 드러낸다. 넓게 확장된 대기실은 유리도어 너머에 비추는 채광으로 조명을 켜지 않아도 온화한 빛을 유유히 품어낸다. 특히 곳곳에 장식된 미술작품과 도자기는 병원이라기보다는 아트공간으로서의 면모를 드러내어 어느덧 편안하고 안락한 감성의 휴식처가 되었다.
“보는 순간 공간이 무척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인테리어 디자이너에게 일단 창을 막지 말자고 말했습니다. 밖이 시원하게 보이는 그대로 두자고 한 것이죠. 또 병원에 출근하면서 내 눈이 좀 시원하고 내 마음이 좀 편해지는 그런 공간이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정면으로 보이는 탁 트인 공간은 벽을 세워 가리지 말고 그대로 보이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전체 노출이 가능한 유리문으로 오픈하게 한 것이죠.”
노만희 원장은 지금의 병원으로 오기 전, 아버지가 개원했던 4층 병원 건물을 계속해서 이어받아 운영해 왔다. 하지만 개원 다음 해에, 건강보험제도가 만들어졌고 변하지 않는 의료제도와 수가 문제로 병원의 재정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비싼 의료 장비를 더 들여놓고 잘해놔도 수가가 똑같은 상황이 발생해서 출혈은 계속해서 커져만 갔다. 건물을 팔고 아버지를 모시면서 조용히 따로 나가서 병원을 운영하고 싶었으나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다. 그 이유는 아버지가 우리나라 정신건강을 위해 애써온 공로와 그간의 노력을 끝까지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버지의 자존심이자 노만희 원장의 자부심이었다. 그렇게 지켜온 노력이 헛되지 않았기에 지금의 만족스러운 공간을 만날 수 있었다고 본다.
“경제 논리로 봤을 때, 병원 건물을 빨리 정리하고, 아버님을 모시면서 조용히 따로 나가서 병원을 운영하고 싶었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나름 알려지신 분이고, 또 생존해 계시는 데 아들이 병원을 처분하고 나와서 따로 하고 있다”라는 이야기가 듣고 싶지 않았습니다. 우리 아버님의 자존심과 제 자존심이 붙어있기에 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다 2002년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이후에도 몇 년을 더 버티다가 팔게 됐습니다. 저는 지금도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노만희 원장은 그동안 전) 대한의사협회 상근부회장, 대한개원의협의회 회장, 대한정신건강의학과의사회 회장, 대한의사협회 총무이사 등을 역임하며 우리나라 의료계 발전을 위해 힘써 왔다. 특히 의료계를 대신해서 정부에 할 말은 했던 소신 있는 인물이었다. 물론 그로 인해 수많은 오해와 비판도 받았지만, 그 역시 우리나라 의료계를 위한 길이라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이번 의료계 사태에 대해 누구보다 안타까운 마음을 갖고 있었다. 노만희 원장은 이번 사태를 보고 ‘의료계 대표들의 정말 솔직하고 진솔한 의견을 제대로 청취할 수 있는 기구 및 단체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의료계 앞날을 위해 의사들이 소신껏 마음 편히 진료할 수 있는 세상, 그런 정책이 만들어졌으면 한다는 소망을 밝혔다. “의사는 자기 전문성과 자존심을 걸고 환자에게 정말 필요하고 도움이 되는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의료 제도나 건강보험 수가에 맞춰야 하는 그런 현실이 좀 달라졌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는 AI나 여러 의료 기술이 발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신의료에 관련된 기술이라든지, 환자를 위하는 의사들의 마인드에 정책이 쫓아가지 못하면 그건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의사들이 소신껏 마음 편히 진료할 수 있는 그런 세상, 그런 정책들이 좀 만들어졌으면 좋겠습니다.”
8. 아버지께서 처음 설립하신 병원은 어떠했나요? 부지 선정부터 어떻게 계획되고 진행된 것인지 그 스토리가 궁금합니다.
저는 처음에 아버지가 개원하셨던 4층 병원 건물을 계속 이어받아서 운영했었습니다. 당시 50베드였고, 병원 이름이 서울백제병원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백제 출신이셔서 이름을 또 촌스럽게 지은 것이죠(웃음). 그전에는 아버지 이름이었던 ‘노동두 정신과 의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의원이 병원으로 승격이 돼서 이름을 바꾼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병원이 처음 세워질 때는 우리나라에 건강보험이 없을 때였습니다. 당시 76년도였고, 77년도에 건강보험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아버님이 굉장히 일찍 아프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레지던트 때부터 낮에는 한양대학교 병원에서 일하고, 밤에는 아버님 병원에 가서 당직을 서가며 환자를 진료했습니다. 그리고 1989년도에 군대를 제대한 후 제가 정식으로 그 병원에서 일을 시작한 것이죠. 그러다가 2년 후인 1991년에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다 맡아서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 돼버린 것입니다. 그래도 그때는 열심히 환자를 보면 다 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우리나라 의료 제도와 건강보험이 점점 맞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대학병원 수준의 의원급이었는데, 나중에는 그게 인정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비싼 의료 장비를 더 들여놓고 잘해놔도 수가가 똑같은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계속해서 출혈은 커져만 갔습니다. 그래도 언젠가 좋은 세상이 될 것이라 믿고 버텼습니다.
이후 2007~8년쯤, ‘과연 언제까지 이대로 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됐습니다. 저와 함께 진료를 보는 의사도 있지만, 언제까지 이것을 감당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니, 제 나이가 6~70대가 되어도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정리하면서 순천향대학교에 팔게 된 것이죠. 사실 그 계산은 그때로부터 한 20년 전에 이미 해놓은 상태였습니다. 경제 논리로 봤을 때 빨리 정리하고, 아버님을 모시면서 저는 조용히 따로 나가서 병원을 운영하고 싶었으나 그렇게 하지 못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나름 알려지신 분이고, 또 생존해 계시는 데 아들이 병원을 처분하고 나와서 따로 하고 있다”라는 이야기가 듣고 싶지 않았습니다. 우리 아버님의 자존심과 제 자존심이 붙어있으니 하지 못한 것입니다. 아버지가 지금껏 우리나라 정신건강을 위해 헌신하고 애쓴 공로와 노력을 쉽게 무너뜨리고 싶지 않은 것이죠. 그래서 늘 지금 병원을 내놓는 게 좋겠다는 계산이 나왔지만, 참고 버티면서 운영한 것입니다. 그러다 2002년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이후에도 몇 년을 더 버티다가 팔게 됐습니다. 저는 지금도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땅값이 오르는 것을 기대하고 계산하면서 더 버텼다면, 아마 나 더 늙어버렸을 겁니다(웃음).
9. 그렇다면 지금의 노만희정신건강의학과의원은 전체 어떠한 컨셉으로 디자인되었으며, 어떤 특징을 갖추고 있는지 자세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사실 제가 사는 곳이 여기였고, 또 제가 보는 환자들도 이곳에 있으니 자연스럽게 한남동으로 알아보게 됐습니다. 그렇게 알아보다가 이 공간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혼자 개원하는 병원 치고는 너무나 큰 평수였습니다. 임대 평수가 95평이니까요. 이렇게까지 넓을 이유가 없지만, 보는 순간 큰 창문 너머로 밖이 보이고 굉장히 쾌적하면서 개방감이 좋아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무리를 해서라도 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테리어디 자이너에게 일단 창을 막지 말자고 말했습니다. 밖이 시원하게 보이는 그대로 두자고 한 것이죠. 또 병원에 출근하면서 내 눈이 좀 시원하고 내 마음이 좀 편해지는 그런 공간으로 디자인했으면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대기실도 굉장히 넓고 쾌적하게 진행했습니다. 특히 정면으로 보이는 탁트인 공간은 어떻게 활용할지 고민했는데 개인적으로 회의를 많이 하니까 벽을 세워 가리지 말고 그대로 보이게 하자고 말했습니다. 더군다나 회의는 낮에 하지 않고 진료 후 아무도 없을 때 하면 되기에 전체 노출이 가능한 유리문으로 오픈하게 한 것이죠. 이 회의실 공간이 포인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10. 앞으로 정신건강의학과 병원은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며 변화될 것으로 보시는지 미래 병원 트렌드에 관한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이론적으로 변화되어야 할 부분은 아주 많습니다. 물론 다양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환자 중심으로 가야 하는 것이 기본인데, 현실에서 의사가 할 수 있는 부분이 무엇인지 굉장히 중요합니다. 특히 의사가 자기 전문성과 자존심을 걸고 환자에게 정말 필요하고 도움이 되는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하는 데, 의료 제도나 건강보험 수가에 맞춰야 하는 그런 현실이 좀 달라졌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는 AI나 여러 의료 기술이 발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신의료에 관련된 기술이라든지, 환자를 위하는 의사들의 마인드에 정책이 쫓아가지 못하면 그건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른 걸 떠나서 의사들이 소신껏 마음 편히 진료할 수 있는 그런 세상, 그런 정책들이 좀 만들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은 정신과뿐만이 아닙니다. 의사들은 사실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준비가 다 되어 있어요. 그런 마인드들은 모두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단지 현실이 따라주지는 못할 뿐이죠.
아울러 저는 병원에 무슨 치료 전문, 무슨 서비스 등 이런 것들을 붙여놓은 건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의사가 할 일은 환자들을 잘 치료해 주면 되거든요. 굳이 ‘무슨 치료를 한다. 전문적이다’ 등의 마케팅으로 자기 병원을 알려야 하는 모습도 좀 없어졌으면 좋겠습니다.
11. 특히 원장님께서는 그동안 대한의사협회나 대한개원의협의회 회장직을 맡으시며 우리나라 의료계 발전을 위해 앞장서 주셨는데요. 현재 의료계 사태를 지켜보시면서 많은 생각이 있으실 것으로 생각됩니다.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어떤 변화가 필요하다고 보시는지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현재 의료가 사태는 의대 증원과 관련된 부분들인데, 솔직히 우리나라 보건복지부 자체의 어떤 판단으로는 이렇게까지 일을 키우지는 못했을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 뜻을 가지고 밀어붙이는 누군가가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당연히 있죠. 사실 과거에 보건복지부에서 어떤 계획 세웠을 때, 대통령실에서 이렇게 적극적으로 브리핑 해주고, 대통령이 직접 언급해 주는 경우들이 없었습니다. 이번에는 대통령의 의지가 너무 강한 것 같습니다. 개혁을 위한 의지가 강한 것은 좋지만, 너무 강한 것이죠. 이렇게 너무 강하다 보니까 정책 실무자들, 즉 보건복지부가 실제 현장에서 환자를 진료하는 의사들이나 교수들의 현실을 무시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쉽게 말해서 일단 늘려놓으면 한곳에 모여 있을 수가 없으니, 자발적으로 시골이나 다른 지방으로 뿔뿔이 흩어질 것이라고 보는 것이죠. 단순하게 덧셈, 뺄셈의 계산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이 위기는 지금이라도 대통령이나, 굳이 대통령 아니라도 좋습니다. 대통령이 전공의를 만나고 해결될 문제는 아닌 것 같고, 의료계 대표들의 정말 솔직하고 진솔한 의견을 제대로 청취할 수 있는 기구 및 단체가 있어야 된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지금 이 사태에 대해 오해가 많습니다. 청와대에서는 2천 명 증원이 과학적인 근거를 토대로 해서 이러한 숫자가 나왔다는 보는데, 사실 2천 명을 얘기한 논문은 어떤 논문도 없습니다. 정부에서는 의대 증원 관련된 논문 3개를 제시했습니다. 그런데 그 저자들이 다들 2천 명을 얘기한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증원은 얘기한 적이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런 것들에 대해서 정말 제대로 된 토론을 하고, 논문도 같이 검토한 후 객관적인 판단을 다시 해서 증원이 필요한지, 그리고 필요하다면 어느 정도 규모가 될지 등을 구체적으로 다시 논의해야 한다고 봅니다. 특히 의료 개혁이라는 명분, 국민 건강을 위한다는 명분만 가지고 밀어붙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1999년 말부터 2000년 말까지 1년여 동안 의약분업 사태가 있었습니다. 저는 당시 대한의사협회 총무이사로서 정부와 협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그때는 서로 말들이 오고 가기도 하면서 소통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가서는 어쨌든 합의까지 유도를 해서 얻은 것도 있었습니다. 물론 내부에서도 말들이 많았지만 51대 49로 겨우 통과가 된 것이죠. 하지만 지금은 정부와 오고 가는 소통 자제가 안 된다는 점에서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12. 노만희정신건강의학과의원은 올해 어떤 계획과 목표를 갖고 있는지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제 건강해야 일을 오래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2006년도부터 직접 강아지를 케어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그 전부터 집에 계속 강아지들은 있었지만, 제가 직접 산책시키거나 밥을 주고, 훈련시키는 상황이 안 되었던 것이죠. 그러다 2006년도에 대한의사협회 일은 그만두고 이제 좀 쉬면서 진료만 하게 될 때, 지금 키우고 있는 개와 다른 쉐도우(개 이름)가 있었습니다. 58kg의 알래스카 말라뮤트의 썰매견을 키웠거든요. 13년 정도 키우고 저세상으로 갔습니다. 이후 3년간의 애도 기간을 가졌습니다.
그러다 누군가를 또 키우고 싶은데 아주 작은 강아지는 싫고, 어느 정도 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단, 급할 때 직접 안고 뛰어갈 수 있는 개를 찾았는데, 바로 지금 키우고 있는 셔틀랜드 쉽독입니다. 몸무게는 12kg 정도 나가는 개입니다. 처음에 개를 분양받기 위해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가 포천에서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일단 그 집에 가서 우리가 키울 의향이 있다고 말한 것이죠. 우리 부부는 거의 일요일마다 한남동에서 포천까지(100km) 자전거를 타고 가서 보고 오기를 3개월 동안 했습니다. 그리고 데려왔습니다.
여름에는 이 쉐도우와 한강에 가서 패들보드도 같이 타고, 자전거에 트레일러를 연결해서 싣고 다닙니다. 또 여름마다 쉐도우와 배를 타고 제주도에 가기도 합니다. 사실 비행기 화물칸에 쉐도우를 넣고 가는 것은 아닌 것 같아 배에 차를 싣고 제주도를 가는 것이죠. 그만큼 일하면서 몸과 마음의 여유를 갖고 우리 부부는 쉐도우와 즐거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13. 마지막으로 공통된 질문을 드립니다.
1. 10년 후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요?
“10년 전과 큰 차이 없다. 별로 안 늙었네, 아직도 일하고 있다”라는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2. 반대로 10년 전에 원장님께 해주고 싶은 말은 무엇이 있을까요?
“병원을 정리하기 참 잘했네. 입원실을 정리한 것은 참 잘한 일이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정말로 행복 지수가 달라졌거든요, 그전에는 집도 병원 4층에 있었습니다. 당직 의사를 구하기가 힘들어서 그곳에 살면서 일했습니다. 그러니까 1층에서 일하고 끝나면 바로 회진을 돌고 올라가는 겁니다. 그 생활을 오랫동안 했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편리한 것도 있었지만, 그 대신에 삶의 질이 떨어졌죠. 저는 한밤중에도 계속 전화를 받아야 해서 휴대폰을 진동으로 해놓고 베개 밑에 깔고 잤습니다. 일반 키폰이 있는데 키폰을 못 받을까 봐서 휴대폰을 두었는데, 또 휴대폰 진동을 못 느낄까 봐 배게 밑에 놓고 자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6시에 퇴근을 한 이후로 할 일이 없어졌어요. 같은 동네에 집이 있어 퇴근하고 가면 6시 10분이나 15분인데, 그 시간에 여유가 있으니 삶의 질이 달라지더군요.
3. 혹시 후배들한테 해주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실까요?
현 상황에서는 후배들한테 미안하다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인터뷰이. 노만희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
글. 박하나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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