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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비수술 척추 치료의 기반 세운 고도일 병원장 (상)volume.29 2023. 1. 4. 16:32
개척자의 정신으로 일구어낸 비수술 치료법,
이제 소외계층과 의료계 발전을 위한 길로 확대!고도일 병원장 앞에는 정말 많은 수식어가 붙어있다. ‘우리나라 비수술 척추 치료 1세대 의료진, 비수술이라는 용어를 처음 쓴 의사, 비수술 치료법을 상용화시킨 인물, 비수술 척추치료 명인, 대한민국 비수술 치료의 기반을 만들어낸 인물, 통증 치료만큼은 이미 아시아 최고로 인정받은 의사’가 그것이다. 하지만 고도일 병원장이 국내에서 일구어낸 일들은 단순히 만들 수도, 만들어지기도 힘든 개척자의 정신으로 이루어낸 일임을 알 수 있다.
그가 그렇게 비수술 치료 전문가가 된 데는 군의관 시절, 수술조차 할 수 없던 불모지 같은 전방에서 수술 대신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계기가 되어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수술을 잘하려면 양동이에서 발을 빼고 봐라”라는 스승님의 말을 되새기며, 그가 선택한 길은 전방에 물리치료실을 최초로 만드는 것이었고, 개척자의 정신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고도일 병원장은 전방에서 군의관으로서 비수술에 대한 관심을 가질 때쯤, 청와대 근무 명령이 떨어지며 김영삼 전 대통령 가족을 치료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당시 손명순 영부인을 치료하면서 키네시오 테이핑 요법의 창시자 켄조 카세 박사를 청와대로 부른 후, 비수술적 치료에 대해 더 깊이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그 능력을 인정받아 청와대에 물리치료실을 만들고, 김대중 전 대통령 취임 이후에도 청와대에서 1년여 동안 군의관으로 더 근무하게 되었다.
그 열정의 첫 결과물은 군의관 때 쓴 책 <알기쉬운 키네시오 테이핑요법>이었으며, 척추내과연구회를 만들어 영어로 된 원서를 몇 명이 모여 번역하고 배우고 공부하면서 20여 권의 책을 쓰게 됐다. 고도일 병원장의 이와 같은 열정은 순수한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열정에도 끈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셈이었다.
고도일 병원장은 이후 호주에서 카이로프랙틱으로 도수치료 의사 자격증을 딴 후 일본의 몇몇 대학병원에서 주사 요법을 배웠으며, 미국 텍사스대 의대 가보벨라 라츠 교수(통증의학교수)를 통해 카데타를 통한 치료법을 배워 주사 요법과 비수술 요법에 대한 체계를 잡았다.
“25년 전에 저는 이것을 확신하게 됐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물리치료, 주사, 수술로만 되어있었습니다. 그것도 획기적이었던 시대였죠. 그런데 더 부담이 없고 더 간단한 비수술이 들어온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 호주, 일본의 비수술 요법을 합쳐서 만들어진 게 지금의 우리 병원입니다. 저는 이것을 다 같이 접목한 의사로 성공했습니다. 비수술이라는 용어도 우리 병원이 먼저 썼습니다. 당시 이런 용어도 없었고 개념도 없던 시대였습니다.”
20년간 일궈온 고도일 병원장의 비수술 치료에 대한 간절한 확신과 열망은 이제 국내 척추 전문병원들이 기초로 다지며 본보기로 삼고 있다. 고도일 병원장은 20년이 흐른 지금, 비수술 치료에 대한 관심을 소외계층과 의료계 발전을 위한 길로 확대해 나갔다. 현재 서울특별시 병원회 회장(대한병원협회 부회장 겸직)을 맡고 있는 고도일 병원장은 병원장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고충을 직접 들어주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병실이 부족한 경우가 많아 여러 병원장을 만나 베드를 확보해 달라고 하고 있지만, 또 무리하게 해 줄 수 없는 것이죠. 병원 내 그런 균형을 맞춰주면서 협조를 구하고 있습니다. 특히 각 병원의 병원장님들은 정부에 직접 연락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협회 회장으로서 병원에서 원하는 바를 대신 이야기해 줍니다.”
개인 생활 없이 점심 도시락을 싸가며 병원장들의 애환과 고충을 들어주고 있는 고도일 원장. 봉사와 헌신으로 제2의 막을 연 그의 새로운 열정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인터뷰이. 고도일병원 고도일 병원장
글. 헤렌 박
1. 병원장님께서는 ‘비수술 척추 치료 1세대 의료진’으로서 지난 21년간 우리나라 척추질환 치료를 수술에서 비수술 중심으로 상용화시키고 척추질환 특화 병원으로 키워나가셨습니다. 고도일병원이 지금껏 성장하게 된 가장 큰 배경이 궁금합니다.
저는 원래 아산병원과 강남세브란스병원에서 척추 수술을 전문으로 하는 의사였습니다. 또 대학에서도 척추 수술을 전공했습니다. 1996년 군의관 시절, 보통 군의관 때는 수도통합병원에서 수술하는 게 의무복무기관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3년 동안 군의관으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강원도 화천 소재 27사단 이기자부대에서 1년 있었고, 2년 동안 청와대에 있었습니다. 당시 김영삼 전 대통령 시절인데 청와대 근무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원래 김영삼 전 대통령은 달리기를 좋아하셨습니다. 그런데 청와대에 들어와서 달리기할 수 없어 수영으로 바꾸는 와중에 어깨와 목을 다치시게 된 것이죠. 그래서 대통령을 치료해야 하는 게 임무였습니다. 나중에 듣고 보니 대통령께 함부로 수술할 수 없던 상황에서, 청와대가 이쪽 분야의 군의관을 전국적으로 찾다가 저를 선택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저는 비수술 요법에 원래 관심은 있었지만, 청와대에서의 경험은 비수술적 치료에 대해 더 깊이 고민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과 손명순 영부인에게 치료하려고 하니 굉장히 부담스러웠습니다. 왜냐하면 연세가 많으셨거든요. 그래도 김영삼 전 대통령은 워낙 건강하셨기 때문에 수영하다가 다친 것은 금방 나았고, 손명순 전 영부인을 치료하면서 가족 주치의가 됐습니다. 당시 치료하기 위해 테이핑 요법을 알아보게 됐습니다. 저는 청와대 경호실을 통해 일본에 사는 키네시오 테이핑 요법의 창시자 켄조 카세 박사를 불렀습니다. 그렇게 해서 연락이 되고 그분께 테이핑을 배우게 된 것이죠. 그래서 청와대에 물리치료실을 만들고 김영삼 전 대통령과 손명순 전 영부인에게 테이핑 요법을 해주게 됐습니다. 손명순 전 영부인 치료는 주로 어깨와 무릎이었습니다. 그리고 능력을 인정받아 김대중 전 대통령 취임 이후에도 청와대에서 1년여 동안 군의관으로 더 근무하게 된 것입니다. 저는 군의관을 마치고 강남세브란스병원에 들어가서 척추수술로 펠로우 과정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다시 종합병원으로 들어가서 수술을 계속했습니다.
제가 1997년 군의관 때 쓴 책이 <알기쉬운 키네시오 테이핑요법>입니다. 군의관 시절, 전국투어 하면서 강의도 했습니다. 그랬더니 KBS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프로그램에서 제가 쓴 책을 보고 작가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당시 그 프로그램이 굉장히 인기가 좋았습니다. 그래서 나가게 됐는데 한번 나간 이후로 환자가 1년 이상 밀릴 정도로 많아졌습니다. 당시 전화 한 통을 받지 못하면 그다음에 연결되는 식인데, 한꺼번에 수만 통이 와서 결국은 병원 전체가 다 먹통이 됐습니다. 테이핑요법이 비수술이라 환자들이 물밀듯이 몰려오게 된 것이죠. 그때 저는 개업을 하지 않아서 수입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었습니다.
이후 2001년도에 서울 서초구에 ‘고도일 신경외과’ 의원을 오픈하게 됐습니다. 비수술 요법을 하는 병원으로, 전국에 있는 모든 수술해야 할 환자들이 다 모여들었습니다. 한번 밀리면 6개월 정도 기다려야 했습니다. 하루에 100명 이상을 봐야 하기에 기존 환자는 볼 수도 없었습니다. 사실 비수술 요법은 테이핑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저는 원래도 카이로프랙틱을 전공했었는데, 2000년엔 호주 왕립 멜버른 기술대학(Royal Melbourne Institution Technology, RMIT)에서 카이로프랙틱으로 의사 자격증을 땄습니다. 도수치료에 대한 전문지식이 원래 있었고, 테이핑요법까지 같이 얹어지면서 비수술 요법으로 치료하는 병원을 만들게 된 것이죠.
문제는 그거로는 너무 약했다는 것입니다. 일본 키네시오 테이핑 요법의 창시자 켄조 카세 박사 역시 미국에서 교육을 받고 왔습니다. 통증 치료는 지금은 아니지만 그 당시 일본이 굉장히 앞서나갔기에, 저는 관동체신병원과 동경대학병원 등 일본의 몇몇 대학병원에서 주사 요법을 배워왔습니다. 그러나 주사 요법만으로도 해결되지 않아, 이후 미국 시스템을 배우려고 미국 텍사스대 의대 가보벨라 라츠 교수(통증의학교수)께 찾아갔습니다. 이는 주사 다음에 안 되면 그다음에 하는 방법인데, 특수 카데타를 통해 약물을 투입해 디스크와 척추 사이의 공간을 벌려 통증을 제거하는 치료법입니다. 이 역시 최초였습니다. 몇 명이 같이 배우러 갔는데, 신경외과에서는 제가 처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사 요법과 비수술 요법에 대해서 체계를 잡아나가게 된 것입니다.
25년 전에 저는 이것을 확신하게 됐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물리치료, 주사, 수술로만 되어있었습니다. 그것도 획기적이었던 시대였죠. 그런데 더 부담이 없고 더 간단한 비수술이 들어온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 호주, 일본의 비수술 요법을 합쳐서 만들어진 게 지금의 우리 병원입니다. 저는 이것을 다 같이 접목한 의사로 성공했습니다. 비수술이라는 용어도 우리 병원이 처음 썼습니다. 당시 이런 용어도 없었고 개념도 없던 시대였습니다.
처음 2001년에 서울 서초구에 ‘고도일 신경외과’ 의원을 오픈하게 된 이후, 8년이 지나 ‘고도일병원’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증축하게 됐습니다. 고도일 신경외과 의원에서 병원으로 승격하게 된 것이죠. 당시는 정말 환자가 많았습니다. 의원일 때는 하루에 7~800명의 환자가 왔으니까요. 그때는 환자들이 앉을자리도 없어서 서 있었는데, 서 있을 자리도 없어서 계단 밖에서 기다려야 했습니다.
2. 처음 비수술 치료에 관심을 갖게 된 특별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군의관 때였습니다. 강원도 화천 소재 27사단 이기자부대로 전방에 있었는데, 수술하지 못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죠. 그 당시에 저에게 척추 수술을 가르쳐 준 스승님이 “수술을 잘하려면 양동이에서 발을 빼고 봐라”였습니다. 그것은 “수술이 아닌 쪽을 보게 되면 더 나은 방법을 찾게 된다”, “수술을 잘하고 싶으면 수술 아닌 것을 먼저 해봐라”라는 말이었습니다. ‘어차피 수술하지 못한 상황이면 수술이 아닌 다른 시도를 해봐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때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이후 카이로프랙틱, 여러 가지 도수치료, 주사 등 수술 아닌 것에 대한 관심을 몇 년 동안 갖게 됐습니다. 실제로 군의관 시절 전방에다 물리치료실을 처음 만들었습니다. 원래 전방에는 그런 것들이 없었습니다. 그것도 사정해서 만들게 됐습니다. 만들어서 경험을 많이 쌓을 수 있었습니다. 청와대에 가게 된 계기도 아마 그 때문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군의관 시절, 척추내과연구회를 만들었는데 그때는 책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영어로 된 원서를 교보문고에 주문하면 몇 달 걸려서 오곤 했으니까요. 그러면 그것을 몇 명이 모여 번역했습니다. 우리는 월, 목, 금, 토 이렇게 모여서 공부했습니다. 월요일은 운동치료에 대해서 배우고, 목요일은 교정 치료, 금요일은 책을 나누어서 읽었습니다. 그리고 토요일은 외국 강사를 불러 강의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책으로 만들었는데, 한 20여 권의 책을 쓴 것 같습니다. 정말 너무나 바빴습니다. 저는 군의관이었기 때문에 시간이 좀 있었지만, 다른 분들은 개업하셔서 환자를 제대로 볼 시간조차 없이 공부했습니다. 그 영어책을 다 읽고 번역해서 책으로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많은 시간을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 3~4년을 그렇게 열정적으로 했던 것 같습니다.
3. 고도일병원이 추구하는 척추질환 치료법은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환자들의 만족도는 어떠한지 궁금합니다.
환자들은 재발 방지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심한 환자들은 수술에 대한 두려움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척추 환자들은 나이가 70~80대로 주로 고령이십니다. 자녀들이 부모님을 모시고 오시는 경우가 많은데, 요즘은 80~90세까지도 오십니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70대가 주였다면, 요즘은 80대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 경우, 자세가 나빠져 목디스크가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즘 운동요법도 많이 나와 병원에서 지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병원은 자체 내 프린트물로 따로 제작해서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운동법에 대해 제가 나름 연구한 것을 집에 가서도 또 해볼 수 있게 하는 것이죠. 유튜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환자들의 만족도는 굉장히 좋습니다. 이게 아니면 안 되는 분들이 많기 때문에 굉장히 만족해 하십니다. 그래서 와인, 참기름 이런 선물을 굉장히 많이 받습니다(웃음). 특히 우리 병원의 비수술 치료 핵심은 ‘5무 시술’입니다. 수술이 필요 없고(무수술), 시술 시 통증이 거의 없으며(무통증), 전신마취도 필요 없고(무전신마취), 흉터와 출혈도 없다(무흉터·무출혈)입니다. 그만큼 되도록 수술하지 않는 방향에서 최선의 진료를 안전하게 진행하기에 만족도가 높다고 볼 수 있습니다.
4. 그 밖에도 고도일병원은 진료과별 숙련된 11명의 전문 의료진이 포진되어 있으며, 비수술 척추·통증·관절·신경·재활 분야에 탁월한 실력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고도일병원의 가장 큰 경쟁력과 차별화된 시스템은 무엇인지 자세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하나를 쭉 일렬로 연계성 있게 치료한다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서 다른 병원은 수술하면 다 수술 쪽으로만 가는데, 우리 병원은 수술도 하고, 비수술도 하는 것이죠. 수술하는 병원은 똑같은 환자를 봤을 때 수술을 할 수도 안 할 수도 있지만, 결국은 수술하는 방향으로 나갑니다. 하지만 우리는 수술이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수술하지 않습니다. 특히 우리 병원은 비수술 치료법이 발전되어서 비수술 환자들이 많으니 이쪽에 신경을 더 많이 쓰는 편입니다. 그리고 예를 들어, 재활치료를 하더라도 재활환자는 대부분 중풍 환자들입니다. 뇌졸중이나 마비 환자들이죠. 이분들에게는 통증이 있으면 바로 통증 치료까지 할 수 있습니다. 보통은 재활에서 통증까지 연결해서 치료하는 병원은 드물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몸이 기울어지면 바로 통증으로 이어집니다. 퇴행도 빨리 오는데, 우리 병원이 그런 것을 다 치료할 수 있는 것이죠.
우리 병원에는 로봇 치료가 있습니다. 로봇은 10억씩 합니다. 아마도 로봇이 있는 병원은 서울에도 몇 개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비 환자가 벌떡 일어나서 로봇이 태우고 바로 걸을 수 있으면 조기 재활이 됩니다. 그런데 아직 병원 규모가 작다 보니 재활환자들을 많이 받지는 못합니다. 또 소수 환자에게만 돈을 벌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적자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숫자로는 안 되기 때문이죠. 그렇지만 앞으로의 미래를 위해서 투자하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더 크게 전체적인 재활병원 겸 암 통증을 비롯한 만성통증까지 다 치료할 수 있는 병원의 꿈이 있기 때문에 차근차근 준비해 나가는 중입니다.
5. 현재 고도일병원은 환자들을 위해 의료뿐만 아니라 지역사회 및 소외계층을 위한 다양한 사회공헌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더욱이 사회공헌활동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여러 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펼치고 있는지 소개해 주세요.
우리 병원은 요양원부터 해서 사회적으로 여러 가지 필요한 곳에 많이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다 하지 못하더라도 앞으로 미래를 생각해 한글날에는 남산골 한옥마을에서 ‘전국 초등부 남산골 한옥마을 문화백일장’을 개최하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해서 열게 된 것입니다. 또 2008년부터 사회공헌 활동의 일환으로 매달 독거노인과 어린이를 위한 봉사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코로나 확산으로 인해 잠시 중단되었지만, 코로나 시대 전까지는 병원 내 자원봉사단체인 ‘허리 튼튼 봉사단’이 매달 독거노인들에게 반찬을 만들어 전달하고, 저소득층 어린이를 위한 문화 체험 봉사활동에도 꾸준히 참여했습니다. 서초구와 함께 이 지역사회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전국적으로 다 할 수 없어서 지역을 위주로 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상황이 점차 좋아지면 앞으로 ‘통증 없는 건강한 세상 만들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새로운 사회공헌 프로그램을 개발해 나눔을 실천해 나갈 예정입니다.
6. 병원장님께서는 서울특별시병원회 회장(대한병원협회 부회장 겸직)도 맡고 계십니다. 주로 어떤 일을 하고 계시며 지역사회 의료계 발전을 위해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신지도 궁금합니다.
재작년까지 서초구의장을 3년간 했었고, 서울특별시 병원회 회장도 지금 3년째 하고 있습니다. 사실 서초구 의장 시절 때도 바빴는데, 서울특별시 병원회는 코로나 때문에 너무 힘들었습니다. 지금도 힘들 예정입니다(웃음). 왜냐하면 코로나 환자들이 생겼을 때 대학병원에서 받아주어야 하는데 병실이 모자라면 구해오고 해결하는 게 저의 일입니다. 모든 대학병원 병원장님들을 다 만나고 있습니다. 또 중소병원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를 받아야 해서 혜민병원, 양지병원, 시립병원, 국립의료원, 서울의료원 등 모든 병원의 병원장을 다 만나서 베드를 확보해야 했습니다. 특히 아산병원이나 삼성병원은 암환자도 봐야 하고 심장환자도 봐야 합니다. 국가적인 재난이기에 그래도 조금이나마 베드를 확보해 달라고 할 수밖에 없지만, 또 무리하게 해 줄 수 없는 것이죠. 병원 내 그런 균형을 맞춰주면서 협조를 구하고 있습니다.
각 병원의 병원장님들은 정부에 직접 연락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협회 회장으로서 병원에서 원하는 바를 대신 이야기해 줍니다. 예를 들어 성모병원은 백혈병이 주가 된 만큼, 면역력이 무엇보다 중요하기에 코로나 환자들을 무작정 받아줄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그런 상황을 병원장님이 직접 설명하면 이기주의로 비쳐질 수 있기에 제가 설명해주는 것이죠. 중간자의 입장은 늘 바쁩니다. 점심시간에 밥 먹을 시간이 없어 주로 도시락을 싸서 병원을 돌아다닙니다. 병원을 찾아가서 설득하고 그쪽 이야기를 들어서 전해주고 그런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인 생활이란 전혀 없는 상황입니다.
인터뷰이. 고도일병원 고도일 병원장
글. 헤렌 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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