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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주 병원 마케터가 바라본 짧고 얕은 문화이야기] 왕가위 감독의 영화 ‘화양연화’, ‘2046’를 떠올리며volume.29 2022. 12. 2. 11:43
왕가위 감독의 영화 ‘화양연화’, ‘2046’를 떠올리며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찬란했던 그 시절 그 순간을 기억으로 봉인하다.20년도 훨씬 지나 이젠 클래식이 되어버린 왕가위 감독의 영화들을 젊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한동안 코로나로 인해 극장 대신 넷플릭스와 같은 OTT를 찾는 이가 늘면서 레트로 열풍과 함께 미장센 등 이미지로 이야기를 만드는 촬영기법이 젊은 층 감성과 맞아떨어진 것이다.
얼마 전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은 양조위가 그 시절 추억을 떠올리게 하더니, 우연히 넷플렉스에서 화양연화의 후속작이라 칭하는 영화 ‘2046’을 보게 되었다. 그러면서 ‘화양연화’를 또다시 봤고, 문득 이 시기면 가슴 시리듯이 떠오르는 ‘화양연화’의 감정을 공유하고 싶어졌다.
2016년 BBC는 ‘21세기 가장 위대한 영화 2위’로 화양연화를 선정했는데 그때 뉴욕타임즈는 ‘숨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영화’라고 평했다. 나 역시 20대 젊은 시절, 처음 접했던 ‘화양연화’의 강렬함을 잊을 수 없다. 화려한 색의 치파오를 입고 국수 통을 들고 슬로우 모션으로 걷는 수리첸(장만옥)은 너무나 예뻤고, 차우(양조위)의 눈빛은 짙었고, 음악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리고 지독히도 슬프고 아련했다. 자극적인 장면이 없는데도 찌릿찌릿하고 끈적끈적하게 감정선을 건드리는 이런 영화가 있을까 싶었다.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그것은 사랑이었다.
1960년 대 홍콩 상하이의 한 아파트에 같은 날 이사 온 차우와 수리첸. 각자의 배우자가 외도를 하고 있다는 걸 정황상 알게 된다. 그런데 배우자에게 확인하고 따지는 게 아니라 두 사람은 왜 배우자들이 만났을까 유추하면서 서로 조심스럽게 그들의 입장을 공유한다. 실제 영화에서 두 사람의 배우자는 카메라 앵글 밖에 있다. 그리고 실제 그들이 외도를 했는지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렇게 두 사람의 상황으로 믿게 만들 뿐이다.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고 반복적으로 말하는 수리첸의 말은 그가 차우에게 얼마나 끌리고 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하지만 두 사람은 철저하게 선을 지킨다. 끌리고 있지만 끌림을 드러내지 않고, 자신이 아닌 상대 배우자의 모습을 연기하고, 표현하면 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잘 아는 사람들처럼 걸러내고 있다. 끌림과 설렘이 고스란히 얼굴에 순간순간 보이지만 그건 두 사람에게 금기 시 된 감정이란 걸 두 사람은 알고 있다. 그 감정에 영원성을 부여할 수 없다는 것을.
그 시대 홍콩은 좁은 집에 여러 사람들이 같이 살고 사람들이 쉽게 남의 이야기를 하며 사회적인 규범이 개인의 행동을 규제하기도 했기에, 사람들의 오해를 피하기 위해 만남을 조심했다. 그런 그들이 선택한 장소는 아이러니하게 호텔이다. 2046호에서 수리첸은 차우가 쓰는 무협소설을 읽고 감수를 한다. 카메라 앵글은 그 이상의 어떠한 신체적 접촉도 담지 않는다. 하지만 두 사람이 한 공간에서 바라보고 웃는 시선 속에서 이미 사랑의 감정이 함께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빛을 발할 수 없는 사랑에 두 사람은 종종 이별 연습을 했다. 그때 수리첸이 연습인데도 서럽게 펑펑 운다. 두 사람의 만남에 끝이 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영화의 대다수 장면은 액자 식의 프레임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거울과 유리에 비친 모습도 많이 보인다. 어떤 이는 이걸 철저히 차우의 시선에 만들었고 차우의 기억으로 엮어진 것이라 평하기도 한다.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수리첸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장면부터 마지막에 앙코르와트에 차우가 찾아가서 그 기둥에 입을 대고 말한 후 그의 기억을 봉인하는 장면까지 차우의 기억으로 구성하고 추억하고 봉인한 듯한 느낌이 크기 때문이다.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아름답게 마무리될 수 있었던 두 사람의 사랑은 그 시간에 묶어서 영원히 간직되었다.
이 글을 쓰는 동안 계속 사랑이란 표현을 반복하지만 영화에서 두 사람은 사랑이란 말을 입 밖으로 낸 적이 없다. 그러면 사랑이 아닌 걸까?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해준이 사랑이란 말을 내뱉은 적이 없지만 서래는 사랑한다고 말했다고 표현한다. 사랑이란 말을 쓰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었던 것일까. 말로 하지 않아도 그것은 사랑이었다고 정의 내리고 싶다.
“사랑은 타이밍이다. 아무리 사랑해도 인연은 엇갈릴 수 있다”
그렇게 봉인한 사랑의 감정을 지닌 차우와 수리첸은 과연 행복했을까. 그걸 보여주는 영화가 4년 후에 개봉한 ‘2046’라고 할 수 있다. 동일한 사람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주인공인 차우는 이름과 직업만 같을 뿐 성격은 완전히 다르다. 차우는 옛 추억이 담긴 2046호에 머물고 싶지만 부득이하게 옆방인 2047호에 머물고, 2046호에 머물게 된 콜걸 바이링(장쯔이)와 육체적 관계만 맺을 뿐 마음은 주지 않는다. 사랑을 갈망하던 바이링이 떠난 후 차우는 호텔 사장의 딸 왕징웬(왕페이)과 가까워지지만 그녀는 떨어져 있는 일본인 남자친구만 여전히 그리워함을 알고 포기한다. 차우는 왕징웬의 도움으로 기억을 잃은 사람들이 기억을 찾아 떠나는 미래도시 2046에 대해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화양연화에서 순애보 같은 사랑을 했던 차우는 2046에서는 거침없는 남녀간의 육체적인 관계를 나눈다. 그리고 많은 여자들을 만나지만 주고받는 사랑이 쉽지 않다. 이 영화에서 엇갈리는 사랑을 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사랑은 원래 이렇게 쓸쓸하고 외롭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인가 싶다. 사랑의 추억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지독히도 힘들다고 말해주는 것처럼.
2046 영화에서 그는 말한다.
“사랑은 타이밍이다. 아무리 사랑해도 인연은 엇갈릴 수 있다”고.홍콩 자치의 마지막 해인 2046, 그리고 영화 속 2046
왕가위가 만든 이 두 편의 영화를 오롯이 사랑이야기로만 담기에는 2046이란 숫자가 가진 상징성이 사실 크다. 화양연화의 배경은 홍콩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귀속되는 시기였고, 영화에 반복되는 2046은 홍콩 자치의 마지막 해로 중국에 홍콩이 복속된 지 50년이 되는 해이다. 특히 영화 속 미래도시 2046 기차에서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가는 것은 홍콩인들에게 중국으로의 귀속으로 인한 자유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과 자유에 대한 의지를 함께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다. 영화에서 2046에 머물지 않고 익숙해진 2047에 차우는 머문다. 이는 좋든 싫든 2046년이 지나가면 불확실하지만 또다시 홍콩 사람들은 적응하며 살아나갈 것을 담아낸 것은 아닐까 싶다.
그런데 이 영화에 상징적 의미를 굳이 강조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 의미를 담아내지 않더라도 지나간 시절의 애틋함과 그리움이 담긴 그 시간이 먼저 떠오를 테니. 지나고 나면 알게 된다. 그 시간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못할 시간이었다는 것도. 어쩌면 이 영화가 당신의 잊혀진 ‘화양연화’를 떠오르게 할지도 모르겠다.
글. 이현주 병원 마케터
이현주
글쓴이 이현주는 바른세상병원에서 홍보마케팅 총괄을 하고 있는 병원 마케터이다.병원 홍보에 진심이긴 하지만, 한 때 서점 주인이 꿈이기도 했던 글쓴이는 독서와 예술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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