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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경험에 대한 대비volume.15 2021. 10. 1. 11:39
2020년, 대구에 위치한 요양원을 기점으로 코로나19가 만들어낸 두려움이 지난 해 우리를 엄습했다. 대구는 봉쇄되었고 거리에 가득했던 사람들이 자취를 감추었던 그 무렵, 대구에 위치한 대형 종합병원 원장님께서 직접 전화를 주셨다. “급히 오픈하면서 제대로 다듬지 못했던 검진센터를 다시 구획해보려고 합니다.” 원장님의 전화 한 통은 당시 코로나19 감염 확산이 한창이던 대구로 나의 발길을 이끌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당시는 과해 보이던 마스크와 선캡, 면장갑까지 완전 무장을 하고 한달음에 대구로 달려갔다.
그런데 나를 반갑게 맞이해주신 병원 관계자분들은 “오히려 병원 안은 마치 태풍의 눈처럼 고요합니다.”라고 푸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코로나19가 극심하니 일반 경증 환자들은 더 이상 병원을 오지 않고, 코로나 검사는 건물 밖 임시 컨테이너 초소에서 드라이브 스루로 행하고 있으니 병원 밖은 검사자들이 줄을 서고 있지만 병원 안은 그 많던 환자들은 다 어디로 갔나 싶을 정도로 한산했던 것이다.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는 병원팬데믹이 전세계를 휩쓸면서 병원은 또 다른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뉴 노멀 언택트’란 단어가 바로 이 시기부터 쓰이게 되었다. 팬데믹이 바꿔놓은 새로운 질서에 대응하며 병원의 공관과 환경은 변화해야 한다. 그렇다면 아무도 겪어보지 않은 이 새로운 시대를 우리는 어떻게 준비해야 할 것인가?
이제 사람들은 타인과 마주치는 것을 꺼리고 어디에 있을지 모를 바이러스에 대해 민감해하며 그렇게 하나씩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예전 같았으면 회의실에서 함께 과자를 먹고 도시락을 챙기던 광경은 마스크 뒤편으로 사라졌다. 극적인 아이디어를 모으며 진행했던 워크숍의 풍경이 그립지만, 이제 우리는 온라인에서 진행하는 디자인 회의에 익숙해졌다.
근거기반 디자인
대구에 위치한 계명대학교 동산병원은 120년 전통을 가진 유서 깊은 병원이다. 지난 세월동안 대구 지역 의료계의 선구자 역할을 도맡아 해왔던 동산병원이 2019년 새 병원으로의 이전을 통해 최첨단 시설을 갖춘 ‘국내 최초 에너지 절약형 친환경 인증 병원’으로 거듭나면서 다시 세간의 뜨거운 관심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당시 우리 회사는 VIP 병동 관련해서 컨설팅을 진행하며 동산병원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모든 병원 신축이 그렇듯 초기 건축설계안으로 시공업체를 선정하고 무사히 완공을 해도, 막상 공간에 사람들이 채워지고 시설을 이용하다 보면 제아무리 꼼꼼한 준비를 했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시행착오는 발생하기 나름이다.
그러나 의료시설의 경우 이러한 작은 차이가 모여 큰 결과로 이어질 있기에 미국에서는 오래 전부터 의료 건축설계에 근거기반 디자인을 접목해 시행착오를 최소화하는 설계를 진행하고 있다. 근거기반 디자인(Evidence-Based Design)은 1960년대 건축분야에서 환경 심리학, 환경과 행태, 거주 후 평가(post-occupancy evaluation) 등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1984년 울리히(Roger Ulrich)의 연구는 의료시설의 환경과 환자의 치유 사이의 관계를 직접적으로 증명한 선구적인 연구로 인식되고 있다. 이후 다수의 연구와 도출된 근거들에 기반한 프로젝트들은 현재까지도 지속적으로 발전하며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들에 대하여 2003년 보건의료시설의 전문 건축가인 해밀턴(Kirk Hamilton)이 근거기반 디자인, 즉 EBD(Evidence-Based Design)라 규정하고 개념화하였다.
의료환경은 환자 뿐만 아니라 각각의 전문영역을 수행하는 의사와 간호사, 병원 종사 직원 등 하나의 공간과 관계된 많은 사람들의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이는 환자 낙상과 의학적 오류 등과 같은 의료 성과로도 연결되기에 의료시설의 다양한 이해관계자 모두가 물리적 환경과 디자인에 대해 공감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하여 디자이너는 선행 연구와 프로젝트 등을 통하여 구축된 ‘과학적 지식’에 해당하는 근거를 공유하고 이에 기반한 디자인을 적용하여야 한다. 이러한 인식에 기초하여 미국에서는 EBD의 활용이 증가하고, EDAC(자격인증)의 가치가 증대되고 있다.
국내에서는 1985년 병원 건축 연구회에서 처음 EBD가 논의되어, 1990년대 중반부터 보다 집중적인 학회로 발돋움해왔다. 의료시설분야를 집중적으로 설계하는 건축가와 관련 기관 및 종사자들이 모인 한국의료복지 건축학회의 연구활동과 다양한 세미나 등을 통해 한국형 근거기반 디자인의 축을 만들어가고 있고, 복잡하고 다변화하고 있는 의료 환경에 대해 공유하면서 의료복지 건축의 수준 향상에 기여하고 있다.
현재 우리는 본격적인 감염 시대에 살고 있는 중이다. 대구에서 설계했던 VIP 검진센터는 고품격 의료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프리미엄 검진센터 공간에 대한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고, 이후 가족단위 대기공간이나 전혀 손을 닿지 않고 쓸 수 있는 화장실에 대한 프로토타입도 만들어졌다. 모든 게 멈춘듯한 상황에 대부분이 우울한 코로나 시기를 보내는 상황이었지만, 앞서 언급한 병원들은 오히려 환자들이 없는 상황 속에서도 변화하고 진화하기 위해 조용하게 환경개선 리모델링을 하거나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며 끊임없이 엔진을 가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글. 노태린 대표 (노태린앤어소시에이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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