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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우 건축가의 '함께 떠나고 싶은 그곳'] 답사 옴니버스 1편ARTICLE 2025. 3. 6. 10:29
각자 독립되어 있는 에피소드를 한데 묶은, 단편집과 같은 스타일을 가지고 있는 영화의 장르를 옴니버스 영화라고 한다. 그것처럼 옴니버스의 형식으로 스케치 칼럼을 엮어보았다. 향 후 본 칼럼은 옴니버스 식 구성으로 서로 다른 여러 장소들을 감성을 담아 에세이 형식으로 요약해 보고자 한다.
나는 해외 출장이나 국내 여행 시에 스케치북과 휴대용 수채화 세트를 습관적으로 챙긴다. 낯선 장소에서 여정을 조금 더 즐기는 방법은 스케치와 함께하는 여행이기 때문이다. 특정 도시나 자연의 풍경을 스케치북에 담는 일이 나에게는 일종의 경건한 의식을 진행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타지에 나가면 잠자리가 바뀌거나 시차 적응이 되지 않아 잠을 설치게 되는 날이 많다. 늦은 밤시간이나 새벽에라도 호텔 객실 테이블에 앉아 답사했던 장소들을 풍경을 소환하여 작은 스케치북에 기록하곤 한다. 이 때 그 장소와 관련된 역사를 검색 해보고 답사 소감도 곁들여 문장으로 기록하면 간단한 여행칼럼이 된다. 여행지에서 스케치한 대상은 디테일까지 기억에 남는다. 나에게 여행의 묘미 중 하나는 낯선 장소를 스케치로 기록하고 구체적인 스토리로 저장하고 심화하여 정리 해보는 일이다. 그렇게 연재 해온 ‘떠나고 싶은 그 곳’ 칼럼이 어느덧 50회를 앞 두고 있다. 체험했던 답사지의 스케치와 소감들로 다양한 맛으로 아이스크림을 골라 먹는 재미가 있는 베스킨라빈스 광고에서처럼 취향에 맞는 여행지를 선택하여 읽는 재미를 HD 매거진 독자들께 선물하고 싶다.
여행 중에는 그 지역만의 특색을 나만의 시선으로 잡아내서 표현하고 싶은데 우리 도시는 상대적으로 특징이 부족한 편이다. 특히 지방도시는 개별적인 특성과 정체성이 모호한 곳이 많다. 지방 어디를 가도 정체성을 잃어버린 풍경들과 무표정한 아파트가 풍경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전국 유명사찰 입구에 위치한 기념품점들을 가보라. 그 사찰의 매력과 잠재력은 실종된 채, 특징이 없고 조악한 중국산 수입 기념품들이 특색 없이 고만고만하게 진열되어 있다. 그 뿐인가. 어디에나 있을법한 도토리묵과 파전, 막걸리를 파는 식당조차도 몰개성하다. 그 지역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고유성과 정체성을 잃어버린 서글픈 우리네 명소와 관광지의 자화상이자 현 주소다.
그럼에도 나는 꾸준히 글과 스케치를 통해 특정한 장소를 기록하고 정체성을 찾아보려고 애쓴다. 순수 자연의 풍경이든 어반스케치든 눈보다 마음으로 보는 여행을 즐기려고 한다. 따라서 스케치와 함께하는 여행은 내게 감성을 한 단계 높여준다. 여행이 주는 기쁨을 풍성하게 누리는 방법 중에 하나다. 결과적으로 여유가 많아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그림으로써 여유를 만들어 간다는 것이 작가로서 나의 지론이다. 이제 내가 답사했던 감성적 공간과 장소들을 한 군데씩 알아보자.
1. 부암동과 환기미술관
서울 시내 부암동 깊숙이 조용한 동네에 격조가 있는 미술관이 하나 있다. 이 미술관을 가려면 부암동 고갯마루 인근의 ‘동양방앗간’ 앞을 지난다. 여기에서 경사길 아래로 내려가면 수화 김환기(1913~1974) 선생을 기념하고 작품을 전시하는 환기미술관을 만날 수 있다. 재미 건축가 우규승의 작품으로 모든 공간이 간결해서 좋다. 전시공간의 평면은 작가의 작품을 감상하기에 적당한 규모와 동선으로 섬세하게 조직되어 있다. 천장고가 제법 높은 정방형의 주 전시 공간을 중심으로 배치하고 중앙에 우물 같은 조형으로 천창을 활용하였다. 유리블럭의 채광 효과도 은은하다. 3층 마지막 전시 공간은 외관에서 보이는 두 개의 반원형(보울트) 지붕을 내부 공간까지 끌어들여 독특한 전시 공간의 단면을 연출한다.
부암동 동양 방앗간 부암동 동양 방앗간 환기미술관 새로운 전시기획을 준비하느라 몇 개월 동안 문을 닫아 발걸음이 뜸했는데 최근에 다시 오픈하여 방문해 보니 전시공간에 변화가 있고 그래서 그런지 전시 작품들도 새롭게 구성되어 보인다. 김환기 선생의 초기 거친 드로잉도 연대별로 잘 정리되어 있다. 50년 대의 화풍에서 보여지는 구상적 표현이 세월이 지날수록 점, 선, 면으로 추상화되더니 임종을 앞 둔 시기의 70년 대 드로잉에서는 가늘고 기다란 선 몇 개만 백지에 남아 액자 속에 존재한다. 또는 반복되는 수많은 점들의 구성에서 작가의 혼과 열정이 깊이를 드러낸다. 초기에 스케치가 단순화되고 추상화되면서 사물의 본질만을 남기고자 했던 작가의 치열한 작업과 의식이 그대로 반영 되어있다.
관람을 마치고 외부로 나오면 계단을 오르며 건축물을 한 바퀴 돌아보기를 권장한다. 계단을 사이에 두고 화강석 마감의 미술관 외벽과 시멘트 벽돌의 담장은 건축마감 재료의 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담장의 상단은 징크판을 접어 금속재의 마감으로 디테일이 좋다. 퇴적된 시간을 말하듯 담쟁이 넝쿨이 벽돌 담장에 자연스럽게 덮여가고 이파리들을 떨군 채 봄을 침묵으로 기다리고 있다. 이곳의 답사는 분주하기만 한 우리네 삶에 환기 선생의 그림처럼 추상의 여백을 만들어 준다.
2. 식사동 인근
식사동 식사동 식사동 식사동 식사동 식사동 식사동 식사동 식사동 식사동 내가 사는 일산 식사동은 아파트 단지 인근에 논과 밭이 있어 산책하기 안성맞춤이다. 고즈넉한 시골의 분위기라서 흙길을 밟고 걸으며 한 주 동안, 직장생활로 익숙했던 도시에서의 분주함을 떨어내기에 좋다. 올해는 반갑게도 눈이 내리는 날이 많아 설경을 감상하는 기회가 자주 생긴다. 갈아엎은 밭고랑에도, 비닐하우스 지붕 위에도, 목제 다리 위에도 새하얀 눈이 쌓이고 길 위에 내 뒤를 쫓아 발자국이 따라온다.
발길을 옮기다 보면 건설장비도 보이고 논두렁이나 밭두렁에서 휴식 중인 농기계들을 자주 만난다. 이런 기계들은 대개 강력한 색상의 옷을 입고 기계미가 충만해서 드로잉의 본능을 자극한다. 어떤 위급상황이 되면 트랜스포머 영화에서처럼 로봇으로 변신하지는 않을까 엉뚱한 상상도 해본다. 포크레인(백호우)을 비롯한 트랙터나 경운기들도 지난 계절 노동을 마치고 동절기를 맞아 동안거 중이다. 아마도 이런 장비들이 발명되기 전까지는 가축과 사람의 몫 이었을텐데 힘든 일을 대신해주는 장비들이 대견하다. 논에는 이미 추수를 마친 후라 벼들은 잘려 나간 채, 밑동만 남아서 옹기종기 좌우로 정렬하며 추수하기 직전의 화려했던 황금빛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다. 인생에는 누구나 리즈시절이 있기 마련이다. 녀석들도 농기계들처럼 내년의 새봄을 기다리며 한겨울을 버티고 있다.
건설공사현장 가끔 주변에 건물을 신축하기 위한 건설공사 현장도 생긴다. 나의 직업이 건축사니 전문인의 자격으로 현장을 방문할 기회가 종종 있다. 일반적으로 공사는 대지 경계에 가설담장을 세우며 시작한다. 다음은 토질 조건에 맞는 적정한 흙막이 공사를 마친 후에 지하층의 깊이 만큼 굴착을 한다. 이 후 기초공사를 마치면 골조 공사가 시작되어 철골이나 콘크리트의 구조물이 만들어지는데 그제야 비로소 건축가는 자신이 설계한 건축의 뼈대를 확인하게 된다.
대부분의 공사 현장은 거친 마초같은 매력이 있다. 그 곳에는 흙먼지가 있고 소음과 진동이 있다. 공사 자재가 쌓여있고 필요한 중장비도 존재한다. 안전모와 안전화로 무장한 건설노동자들이 저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건설 현장은 ‘다이나믹’ 그 자체다. 이렇듯 하나의 건축물이 탄생하고 그 속에 담긴 건축가의 의도가 드러나려면 많은 이들의 수고가 더해져야 한다. 찜통더위나 혹한의 겨울에도, 혹은 현장의 어떠한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일하는 인부들에게서 신성한 노동의 가치를 본다.
3. 원당역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원당역 인근 원당역 버스정류장 대중교통으로 회사를 출퇴근을 한 지도 몇 년 지나니 익숙해졌다. 처음에는 대중교통에 적응되지 않아서 일상이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승용차 없이 혼자서 어디를 어떻게 가야 하는지 깜깜이가 되어 당황스러웠는데 지금은 익숙해졌다. 휴대폰에서 편리한 대중교통 안내 앱을 찾아 잘 활용하고 있는데 우리나라 대중교통 안내 정보와 환승 시스템이 이렇게 편리할 줄은 미처 몰랐다. 차를 버리고 걷는 순간 내가 몰랐던 신세계를 하나씩 알아가는 일도 신기하고 재미있을 뿐 아니라 보행량도 이전보다 부쩍 늘었다.
가끔은 퇴근 시 원당역에서 환승 할 일도 생기는데 줄을 서서 기다리는 동안 일상의 소소한 감성의 풍경들이 시선에 포착된다. 조그만 마을버스들이 부지런히 승객들을 실어 나르는 모습, 정류장 옆 커다란 나무 한그루, 줄을 선채로 옆 사람과 떠들거나 조용히 휴대폰 화면에 집중하는 사람들, 무심히 이 모든 정황들을 목도하고 말없이 서 있는 점잖은 전봇대...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지만 승용차로 출퇴근했던 시기에 놓치고 살았던 장면들이니 운전을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풍경들이 살갑다. 저녁 무렵, 저마다 가족의 품으로 귀갓길을 서둘러 총총히 걸어가는 발걸음을 보며 하루의 피로감을 씻어본다.
글/그림. 임진우 (건축가 / 정림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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