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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우 건축가의 '함께 떠나고 싶은 그곳'] 미국 시카고카테고리 없음 2021. 11. 25. 15:16
건축의 도시, 시카고
1871년 시카고에서 발생한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로 도시의 3분의 1이 불타버리고 10만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한 이후, 대규모 도시 재건을 통해 오늘날 초고층으로 이루어진 현대건축의 도시로 변모했다. 불행한 역사를 딛고 극복하여 새로운 창조도시를 만들어낸 시민들의 도전정신은 멋진 건축의 도시만큼이나 위대하다.
이 도시 재건 과정에서 철과 유리 같은 새로운 건축 재료를 바탕으로 고층빌딩을 통해 실험과 도전정신을 구현한 건축가들을 ‘시카고학파’라고 부른다. 그중 근대건축의 선구자인 루이스 설리반(Louis H. Sullivan)을 비롯하여 그의 제자인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 같은 건축 거장의 계보가 이어지며 새로운 건축역사의 뿌리를 심었다.
SOM이 설계한 시어스 타워(현 윌리스 타워)는 1998년까지 세계 최고의 빌딩이었고, 조형성이 뛰어나 시카고 건축 중 듬직한 맏형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그 외에도 미스 반 데어 로에(Ludwig Mies van der Rohe), 헬무트 얀(Helmut Jahn), KPF의 작품들도 쉽게 눈에 띈다.
시카고를 무대로 한 영화에 잘 등장하는 마리나 시티는 원통형 쌍둥이 빌딩으로 생김새가 독특하여 옥수수 빌딩이라는 재미있는 별명이 붙어있다.
미시간 호수와 연결되는 시카고 강 유람선을 타면 선상에서 보이는 시카고의 건축물들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마이크를 잡은 가이드의 해박한 도시역사와 건축에 관한 전문지식은 건축전문가 이상이라 놀랍다. 도시와 건축에 관한 해설에 관광객들도 귀를 기울인다. 과연 건축을 사랑하는 도시답다.
예술과 문화의 도시, 시카고
명문 미술대학교인 시카고 예술대학이 있고 빼놓을 수 없는 방문 코스 역시 시카고 미술관이다. 피카소, 고흐, 밀레, 모네 등 세계적으로 내로라하는 유명 화가들의 작품을 감상하고 렌조 피아노(Renzo Piano)가 증축한 모던 윙을 통해 밀레니엄 파크로 향한 브리지를 건너본다.
넓은 잔디광장에 시민들이 간이의자와 돗자리를 깔고 남녀노소가 어우러져 자유롭게 주말 음악공연을 즐기고 있다. 야외 공연장의 디자인도 예사롭지 않은데 자세히 보니 프랭크 게리(Frank Owen Gehry) 특유의 조형감각과 솜씨가 돋보인다.
인근에는 스페인의 개념 예술가인 하우메 플렌사(Jaume Plensa)가 디자인했다는 크라운 분수광장이 있다. 대형 LED 전광판을 활용하여 시카고 시민 100명의 얼굴로 이루어진 아트타워와 함께 이곳 분수 속에서 뛰어노는 철부지 아이들과 물장난을 치며 동심으로 돌아가 본다.
생김새가 마치 강낭콩 같아서 시카고 빈(Bean)이라는 별명이 붙은 설치미술품 ‘클라우드 게이트’도 시카고의 새로운 상징으로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높다. 거울같이 매끄러운 금속 표면에 나의 모습이 시카고를 배경으로 하여 다양한 표정으로 일그러져 보인다. 이방인으로서 나의 리얼리티가 어디쯤 존재하는지 찾아보면 많은 군중 사이에서 발견한다.
때로는 암울한 범죄 영화의 배경으로도 자주 등장해서 양면성을 가진 도시이기도 하지만 바다처럼 널따란 미시간 호 수변공원을 따라 산책을 즐기는 것도 또 하나의 여행 꿀팁이다. 에들러 천문대(Adler planetarium)까지 도달해서 뒤돌아본 시카고의 도시 이미지와 스카이라인은 여전히 압권이다.
몇 년 전 시카고에서 돌아오는 기내에서 지루한 비행시간에 스케치북을 꺼내어 시카고 풍경을 떠올리며 그리고 있었다. 지나가던 매력적인 여승무원이 묻는다.
“어머, 화가세요?”
“화가는 아니고 건축가입니다. 취미로 스케치를 하지요. ㅎㅎ...”
기내에서 스케치했던 이 한 폭의 시카고 풍경이 기내에서 잠시 설렜던 에피소드를 오래도록 추억하게 한다. 코로나가 종식되어 일상이 회복되면 꼭 한 번 다시 가보고 싶은 도시다.
글/그림. 임진우 (건축가 / 정림건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