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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우 건축가의 '함께 떠나고 싶은 그곳'] 답사 옴니버스 5편ARTICLE 2025. 10. 2. 05:48
단양 사인암
남조천의 물줄기가 굽이굽이 흐르는 단양에 숨겨진 보물, 바로 사인암이다. 깎아지른 듯 솟아 있는 거대한 바위들이 신비로운 풍경을 자아낸다. 그 위를 가득 채운 푸른 소나무들은 마치 한 폭의 수묵화처럼 고즈넉한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많은 동양화가들이 한 번쯤은 그렸을 만한 풍경이다.
담양 사인암 사인암은 고려 시대의 명신, 우탁 선생이 노닐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깊은 학문과 높은 뜻이 이곳에 스며든 듯, 바위 하나하나에 세월의 무게가 느껴진다. 그 아래를 흐르는 맑은 물은 속세의 모든 시름을 씻어내고, 잔잔한 물결은 마음속에 평온을 선물한다.
사인암의 진정한 매력은 빛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모습이다. 이른 아침, 물안개가 피어오를 때면 신비로운 분위기가 감돌고, 해 질 녘 노을이 드리워지면 붉게 물든 바위들이 황홀한 장관을 연출한다. 시간이 멈춘 듯한 고요함 속에서 자연의 경이로움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이 곳은 물소리와 새소리만이 가득한 공간에서 자연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다.
밀양 영남루
조선시대 3대 누각으로 진주 남강의 촉석루, 평양 대동강의 부벽루와 함께 밀양 밀양강의 영남루를 꼽는다. 부벽루는 평양이라 가본 적이 없지만 영남루와 촉석루를 답사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여러 누각이 그렇듯이 강을 전망하는 절벽 위에 위치하는 영남루는 밀양의 대표적인 명소인데 조선시대의 객사였던 밀양관의 부속건물로, 조선 후기 대표적인 목조건축물이다. 양쪽 날개를 뻗은 듯, 두 건물을 거느리고 있어서 더욱 웅장하게 보인다. 이 누각에 올라 강바람을 맞으며 바라보는 밀양강도 아름답지만 넓은 마루에 편하게 앉으면 시조라도 한 수 읊조리고 싶어진다. 영남루 아래쪽에는 정절을 지키다가 억울하게 죽은 전설의 주인공 아랑을 모신 사당인 아랑각이 있어 급경사지만 계단을 오르내리는 적요한 길로 운치가 있다.
밀양 영남루 밀양 영남루 시린 겨울 하늘을 배경으로 맞은 편 강가에서 올려다 본 영남루는 위풍당당하다. 부속건물과의 연결을 위한 지붕 선의 높낮이 변화는 리듬감 있게 처리했다. 오늘따라 겨울바람은 제법 세지만 ‘밀양’이라는 말처럼 은밀한 햇볕이 담겨있는지 살짝 온기가 느껴진다. 넓은 강가에서 어르신들이 손주뻘 되는 아이들과 함께 공중에 연을 날리고 있다. 슬픈 아랑의 영혼도 저 연들처럼 자유롭게 하늘을 날고 있을까.
진주 촉석루
진주성의 남쪽 벼랑 위에 우뚝 선 촉석루를 사진에서 보고 언젠가 진주에 가면 답사해보고 싶었는데 그런 기회가 생겨 다행이다. 과연 영남 제일의 아름다운 누각이다.
진주 촉석루 계단에 신발을 벗고 누각 위에 오르니 남강과 함께 진주 시내의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한눈에 펼쳐진다. 현대건물들이 없던 조선시대의 풍광은 얼마나 더 아름다웠을까. 잠시 쉬었다 가야겠다는 생각에 등에 진 백팩을 내려놓고 목제 난간에 기대어 잠시 촉석루의 주인이 되어본다. 오월 하순인데도 벌써 초여름의 날씨다. 누마루에서 앉으니 땀으로 축축해진 셔츠 안으로 시원한 바람이 들어 상쾌하다. 평소에는 경치를 즐기며 시인 묵객들이 풍류를 읊다가 전쟁이 나면 진주성을 지키고 작전을 지휘하는 본부로 변신했다고 한다. 여유와 느림의 공간에서 긴장과 민첩함의 공간으로 바뀌는 이른바 장소의 변신이 가능한 곳이다.
진주 촉석루 진주 촉석루 누마루에서 내려와 성벽 쪽문을 나서서 급경사 계단을 내려오면 강변에 면한 널찍한 바위에 도달한다. 강물과 가까이 있으니 더욱 친근하고 매력적인 장소다. 하지만 의암이라고 불리는 이 곳은 나약한 여성의 몸으로 승리에 도취한 왜장을 끌어 안은 채 강물로 투신한 논개의 애절한 역사가 전해지는 장소다. 그녀의 결행과 정신을 기리는 변영로 시인의 노래가 귓전에 맴돈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은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 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논개의 숭고한 희생이 일어났던 그 바위에 서서 남강을 바라보지만 푸른 강물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오늘도 천천히 흐르고 있다. 세월도 무심하고 강물도 무심하다.
제주 산지천
제주의 푸른 하늘 아래 산지천부터 서부두까지 걸어본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풍경들이 펼쳐지는 이 길은 마치 시간이 겹겹이 쌓인 역사의 층을 걷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
산지천을 따라 걷는 길은 고요함 속에서 시작된다. 오래전 이 물길을 따라 짐을 나르던 상인들, 물을 길어가던 여인들의 모습이 희미하게 그려지는 듯하다. 잊혀 가는 제주의 옛 모습과 현재가 공존하는 산지천은 과거를 기억하며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잔잔한 위로를 건넨다.
산지천 산지천 산지천을 지나 발걸음을 옮기면 동문시장의 활기찬 소리가 귓가에 가득하다. 이곳은 제주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자 여행객들에게는 잊지 못할 추억을 선사하는 곳이다.
동문시장을 뒤로하고 노을빛으로 물드는 항구인 서부두로 향한다. 해 질 녘 서부두 방파제에 서니, 붉게 물든 하늘 아래 어선들이 한 폭의 그림처럼 정박해 있다. 짭조름한 바다 내음이 코끝을 간지럽히고, 갈매기들의 울음소리가 평화로운 풍경에 잔잔한 생동감을 더한다. 파도가 방파제에 부딪히며 내는 소리는 마치 자연의 자장가처럼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바다 저편으로 천천히 사라지는 태양을 바라보며, 오늘 걸었던 길들을 되새겨본다. 산지천의 고요함, 동문시장의 활기, 그리고 서부두와 도두항의 쓸쓸한 아름다움까지, 이 모든 풍경들이 하나로 이어져 제주의 다채로운 매력을 보여주고 있다. 짧은 여정이었지만, 제주의 숨결을 느끼고 삶의 위안을 얻을 수 있었던 시간이다.
산지천 인근 제주 서부두 제주 도두항 제주 공항길 가파도
몇 년 전 연휴 기간에 제주에 갔다가 예정도 없이 불쑥 들른 가파도는 의외로 인상적인 장소였다. 제주도민 중에서도 가보지 못한 사람이 의외로 많다는 은둔의 섬, 미지의 섬, 신비의 섬이다. 모슬포항에서 남쪽으로 5.5km 해상에 위치하며 더 남쪽에는 마라도가 있다. “갚아도(가파도) 그만, 말아도(마라도) 그만”이라는 작명 유래도 재미로 전해진다. 조선시대에 네덜란드인 하멜이 제주에 표류하여 14년을 보내고 귀국 후에 쓴 하멜표류기에도 가파도가 소개되어 있다.
제주 가파도 제주 가파도 현무암을 쌓은 돌담과 원색의 낮은 지붕의 민가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는 마을은 고즈넉하여 나처럼 고밀도의 도시에서 쫓기듯 날아온 방문객은 오랜만에 편안한 감성으로 둘러보게 된다. 양지바른 곳에 길고양이들도 흔하게 마주친다. 바람과 파도가 제법 거친 섬이지만 그 덕분에 봄철에 가면 물결치는 청보리 밭을 볼 수 있다. 섬 전체는 언덕이 없어 수평적으로 이루어져 있고 바람개비 풍력발전기만이 수직적인 오브제가 되어 현재 서 있는 위치를 확인시켜 준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가을날 오후, 여유를 가지고 어슬렁거리며 방파제를 산책해도 좋고 자전거를 빌려 섬을 한 바퀴 돌며 슬로우라이프를 체험하기에도 안성맞춤이다. 이따금씩 불어오는 바닷바람은 시원하지만 아직은 가을 햇살이 따갑다.
제주 가파 제주 가파도
글/그림. 임진우 (건축가 / 정림건축)
한국의료복지건축학회 부회장728x90'ARTICLE'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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